10화. 좌절 기록

by 안다훈



채 사회화되기 전에 심긴 자신감은 독이 됐다. 나서면 나댄다 지적했고 낙천성은 뿌리가 얕아 금세 무너졌다. 아마 신입생 오티 때 처음 어긋나지 않았을까.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며 의욕만 앞세운 스무 살의 삼월. 손 들고 강의실 한복판으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다른 애들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준비했다. '어느 정도가 적당할 거야' '이런 말을 해야지' 그러고 자리에 앉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나왔을까, 관심받고 싶었나,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나, 지질했던 예전으로 돌아간 듯 눈빛이 흔들렸다. 동기들이 거리를 두고 주변에 앉은 상황이 부담됐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허공에다 "지수야, 넌 괜찮아." "따돌림당했지만 괜찮아." "피부가 안 좋아서 마음 고생했지만 괜찮아."와 같은 말을 했던가. '이게 아닌데' 후회했다. 괜히 나왔나 싶었다. 순진하게 바닥까지 드러냈고, 내가 말하는 동안에는 기분 탓인지 몰라도 공기가 달랐다.

스무 살쯤 교내 학생상담센터에 찾아갔다. 무슨 고민 때문에 왔냐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문턱까지 갔으나 내미는 손을 잡지 못했다. 다시 억누르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스물세 살엔 동아리 선배 권유로 사이코드라마 워크숍에 참여했다. 강의실 뒤편에 앉아 있던 난 이번에도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문제점을 말하면 다른 성인 남성들이 나를 둘러싼다. 힘으로 그들을 뚫고 나오는 것은 문제 해결을 뜻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어라 외치며 안간힘을 썼다. 또 한 번 발가벗겨진 기분이 되어 마음만 앞선 스스로를 원망했다. 날 어떻게 생각할까, 바보 같아 보이면 어쩌지,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끝까지 고민만 하다가 후회하는 게 나았을까. 귀갓길에 남학생 둘이 용기 있는 모습을 잘 봤다며 말을 걸었다. 그중 한 명은 번호까지 받아 갔지만 연락은 없었다. 말할 필요 없이 잊고 싶은 기억이다.

정신과에 처음 간 건 스물여덟 살 때. 아는 사람이 다녔던 병원을 추천받았다. 간단한 검사지를 작성하고 상담을 짧게 한 뒤에 약을 타 왔다. 그다음에 갔을 때는 오 분도 채 안 돼서 약만 처방받았으며 대화를 원하고 기대했기에 허무했다. 이럴 거면 괜히 왔나, 기록만 남을 텐데 뭐 하러 왔을까, 후회마저 들었다. 더 알아볼 여력이 없었다. 한동안 희망 없이 견디는 게 나을 듯했다. 서너 해 지나 괜찮아지던 차에 직장에서 내상을 입었다.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려는데 백혈병이란다. 무균실에 입원했을 땐 기록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정신과 진료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의료진이 부족했기에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음과 몸 모두 무너진 채 퇴원했으며 쌓인 고민 위로 또 다른 고민이 쌓이고 쌓이고 쌓였다. 뒤섞여 쌓인 내면은 젠가 같았다.

문제가 뭔지 알기 위해 풀 배터리 검사(종합심리평가)를 받았다. 심리 보고서를 받아 보니 '임상적인 수준의 정서적 문제는 시사되지 않으나 … 어려움 … 외로움 … 두려움 … 저조한 자신감 및 유능감 … 기질적으로 위험회피 수준이 높고 사소한 걱정 … 비관적 … 불안감… 부정적인 정서를 지나치게 억제 … 자기 비난적이고 비관적인 사고에 몰두 … 무능감, 우울감 ….'이라고 적혔다. 나열된 명사들은 답이 되지 않았기에 머리만 아파 왔다. 될 때까지 해 보자는 심정으로 소개받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 갔다. 앉자마자 "왜 왔어요?" "뭐 때문에 왔어요?"로 시작해서 편안하게 말을 못 한다, 방어적이다, 믿지 못한다, 남을 경계한다, 본인을 물건 취급한다, 따뜻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문제 삼는다, 처음에 이상하다고 느꼈다, 성격적인 문제다와 같은 말들을 들었다. 반말과 높임말을 섞어 쓰고 두세 차례 말을 끊었으며 "안지수 씨는 그게 문제예요."라는 얘기를 두어 번 하셨다. 심리 상담을 원해서 왔지만 낙인만 찍힌 느낌이었고 알고 보니 심리상담사 1·2급 자격증도, 상담 경력도 없는 분이셨다.

사흘 뒤에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했다. 이쯤 되면 오기다. 이리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나. 비정상으로 살면서 그게 비정상인 줄 몰랐던 건 아닌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궤적을 바꿔야 한다. 이처럼 안타까움에 떠밀려 나를 쏟아부었다. 이십 대 후반에 낸 에세이, 책에 싣지 않았거나 출간 이후에 쓴 글, 종합심리평가 심리 보고서, 부정적인 기억을 모조리 적은 '기억 기록'을 가져갔다. 말과 글로 쏟아지는 나는 차곡차곡 담긴다. 얘기를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내게 알맞은 공간이다. 새어 나갈 걱정 없이 털어놓는다. 하나씩 답을 찾아 가면 된다. "이 시간은 그대를 위한 시간입니다."라는 말씀처럼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며. 묵은 기억들을 비우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낮의 우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생이 끝난 시점에서 불행했던 세월만큼 더 살 수는 없다. 우울증이 삼켜 버린 시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오늘을 살며 내일을 준비하려 한다. 어제는 이전보다 덜 되돌아보면서. 십이 년,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도 걸렸다.


* 앤드루 솔로몬, 《한낮의 우울》(민음사). 7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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