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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Nov 17. 2019

<나랏말싸미>를 위한 변명

나랏말싸미(조철현, 2019)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


역사왜곡을 당당하게 하시네요. 안 부끄러우세요???
eunj****

영화라고 봐주기엔 심각한 역사 훼손
khjo****

영화 ‘나랏말싸미’ 네이버 영화 평점 중


역사는 좋은 소재가 된다. 영화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문학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역사는 우리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선사해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였다. 우리나라에도 ‘임진록(작자미상)’ 등 역사적 사건을 다룬 소설이 많았다. 영화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인류는 역사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다.


지난여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했다. 개봉하자마자 극장을 찾아가 관람했다. 음악이나 미장센은 물론이고 스토리 구성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관람객(또는 관람하지 않은 사람들도)은 승려 ‘신미’가 한글 창제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점을 들어 역사왜곡 영화라며 비토 했다. 아무래도 당시 일본과 무역분쟁 중 존재했던 민족주의적 정서도 한몫했었던 듯하다.


영화를 상당히 괜찮게 봤던 사람으로서 역사를 왜곡했다는 주장을 두고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본질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영화는 왜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것일까?’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단 한치의 역사왜곡도 없이 역사적 소재를 다룰 수 있는가?’ 그러다가 나의 생각은 다소 도발적인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애초에 역사를 왜곡(또는 변형) 하지 않는 영화를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역사를 역사책 이외의 장소에서 찾아보는 인간의 심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사극과 역사 영화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어떤 정서가 바탕이 되어 있을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해당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그 생생함을 역사적 기술(記述) 바깥에서 체험해보고자 하는 심리다. 예컨대 우리는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이겼다는 역사적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극장을 찾아가 ‘명량’을 관람했다.


자랑스러운 역사의 순간을 영화적으로 체험하고 싶은 심리다. 그 과정에서 객관적 ‘사실’은 주관적 ‘진실’로 변모한다. 역사적 사실은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크린 위에서는 다르다. 역사적 사실 이면에서 선인과 악인을 규정짓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선인과 동일시하도록 몽타주를 구성한다. 역사 영화는 객관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 지점에서 무기력해진다. E.H 카도 역사책의 서술이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랑케를 비판했다. 하물며 영화는 오죽할까?




영화 ‘고지전’ 스틸컷

고지전(장훈, 2011)은 한국전쟁 당시 몇 안되던 국군의 업적 중 하나인 포항 철수작전을 완전히 실패한 작전으로 묘사했다. 국군 병력은 물론이고 피난민에다가 그들이 기르던 송아지까지 안전하게 철수시킨 포항 철수작전은 아비규환 속에서 아군이 아군에게 총질을 가하는 카오스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전은 2011년 대종상 최우수 영화로 선정되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국가부도의 날(최국희)은 외환위기 당시 정부 고위 관리들이 대기업과 결탁해 필요하지도 않은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신미 스님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기록에 없으니 역사왜곡이라면 국가부도의 날은 기록에 버젓이 남아있는 사실들도 왜곡했다. 질로 따지면 더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그러나 국가부도의 날은 손익분기점인 260만 명을 한참 넘긴 37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모든 영화가 역사를 사실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문학과 영화의 장으로 넘어올 때 더 이상 그 객관성이 유지될 수 없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앞서서 영화 두 편을 사례로 들었지만 비단 영화에서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 군담소설 ‘임진록’에는 조선이 군대를 모아 일본에 쳐들어가는 황당한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박 씨 부인전’에서는 박 씨 부인이 청나라 군인들을 혼쭐 내는 서사가 존재한다. 물론 이런 일들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당치도 않은 일들이 문학과 영화에서 그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나랏말싸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는 너의 일을 하여라, 나는 나의 일을 하겠다” 마찬가지다. 영화에는 영화의 일이 있고 역사에는 역사의 일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영화의 일에 역사의 일을 뒤섞고 역사의 일에 영화의 일을 뒤섞는다. 역사의 일에 영화의 일을 뒤섞으면 그것도 문제지만(동북공정), 영화의 일에 역사의 일을 뒤섞는 것도 문제다. 그 순간 영화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니게 된다.


영화의 일에 역사의 일을 뒤섞으면 특정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감독이 누구든지 간에 내용이 똑같아진다. 그래서, 영화의 일에 역사의 일이 뒤섞이면 영화의 영화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는 것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가 없어서에 가깝다. 관객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영화에 객관성을 요구하는 본인의 모습이야말로 주관적이라는 것을!


*물론 필자는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설은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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