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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Dec 10. 2019

<밀양> 보이는 것과 믿기는 것

밀양(이창동, 2007)

그러니까 우리 원장님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제?


신애(전도연 분)가 약사의 전도 행위에 거부감을 보이자 들은 말이다. 나는 <밀양>을 관통하는 주제가 이 대사 한 마디에 다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믿고 안 믿고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신애는 땅을 보러 다닌다. 부러 소문도 낸다. 돈 많은 티를 내서 동네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이는 대로 믿었다. 그녀가 부자일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재산은 겨우 통장에 남은 870만 원뿐. 결국 그녀의 '보여지기'는 아들에 대한 유괴 동기가 되고 만다.


개업 인사차 들른 근처 옷가게에서도 신애는 인테리어 이야기를 한다. 가게 분위기를 좀 더 밝게 바꾸면 매상이 오를 거라고. 이렇게 보면 신애는 보이는 것만 믿는 성격인 것만 같다. 뿐만 아니다.


"여는 뭐 한나라당 도시고"


신애를 연모하던 종철(송강호 분)이 '준 피아노'에 찾아온다. 그의 손에는 액자가 들려있다. 종철은 신애가 받지도 않은 상장을 허락도 없이 벽에 건다. 상장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지만 신애는 냉랭하게 말한다. "저 이런 거 안 받았는데요?" 그러나 서울에서 찾아온 동생이 상장을 보고 감탄하자 이내 상장을 받았다는 거짓말을 한다. 사실이 아닌 것도 보이는 것이 되자 믿기 시작한 것.


아들을 잃은 신애는 상실감에 교회를 찾는다. 보이는 것만 믿던 신애가 드디어 사상적 전향(?)을 감행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신애는 보는 것에 충실한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녀가 교도소에 면회를 간 이유는 아가페적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살해범이 얼마나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는지 제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용서를 하러 면회 신청할 정도로 신애의 믿음이 투철했다면 살해범의 딸이 맞고만 있는 건 왜 가만히 지켜보았을까? 이토록 뿌리가 약했던 그녀의 믿음은 살해범의 좋아진 얼굴과 구원의 소식에 무너지고 만다.


마치 조명 없이 자연광으로만 찍은 것 같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유물론이니 관념론이니 하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려 한다. 다만 우리의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는 명제는 한 가지 질문을 필요로 한다는 점만 밝히려 한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면, 제대로 보고는 있는 건지부터 물어야 한다.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 뒤, '내가 보고 있으니 진실이야'라고 자위하는 것만큼 한심한 일이 없다.


신애는 고의로 죄를 지으며 하늘을 우러러 말한다. 지금 보고 있느냐고. 신이 있다면 보고 있을 거다. 그러나 당신이 짓는 죄가 아니라 당신이 가진 아픔부터 먼저 보고 있을 거다. 그게 '보는 것'과 '믿는 것'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와 절대자의 견해 차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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