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수업(김진민, 2020)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 재밌는 말을 했다. 보수 정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보수라는 말보다 자유라는 말을 더 좋아하며, 배고픈 사람에게 빵 먹을 돈이 없다면 그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그의 강변을 두고 언론과 정계가 시끌시끌하다.
'지수'(김동희 분)는 평범한 삶을 꿈꾸는 고등학생이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파탄이 나버린 집안 환경 속에서도 지수는 학업을 놓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평범한 삶이란 단지 대학 졸업해서 안정적인 직장 잡고 조용히 지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삶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지수가 지불해야 하는 중간 통행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수가 '평범한 삶'을 위해 필요한 돈은 9,000 만원. 평범한 삶을 꿈꿀 자유는 공짜지만, 평범하게 살 자유(free)는 공짜(free)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삶의 모든 국면을 화폐화한다...(중략)... 중세 유럽인들은 굳이 무한정한 화폐 증식을 추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은 수입에 만족하고 잘 먹기보다는 차라리 편히 자는 편을 택했다.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中
불의의 사고로 그동안 모은 돈을 잃고 성매매 사업을 잠시 쉬게 될 때, 지수는 학원부터 끊었다. 자본주의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화폐화한다. 평범한 삶을 위해 필요한 평범치 않은 성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성매매 사업의 또 다른 참가자인 서민희(정다빈 분) 역시 일진 남자 친구와 교제할 자유를 구매하기 위해 스스로를 매매한다.
그런 의미에서 배규리(박주현 분)가 성매매 사업에 투신하는 동기에 의문이 들 수 있다. 억압받는 가정환경에 본인의 손목을 그을 정도로 외로운 인물임은 알겠으나, 그녀가 성매매 사업에까지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풍족한 집안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사는 그녀가 주체적으로 범죄에 연루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드라마 종반부에서 그녀가 부모를 협박해 호주로 떠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동기는 분명해진다. 부모의 재력으로 인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그녀는 - 배규리의 모친(심이영 분)은 오지수와 함께 있는 배규리를 차에 태워 사실상 헤어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 경제적 자립을 통해 집안을 나와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본분을 다 하도록 명령한다(지층화). 적당히 분수에 맞는 삶을 추구한다면 돈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돈 없이 꾸는 꿈만 크게 되면 비극이 생긴다. 지수는 누가 들어도 '평범한 삶'을 추구했지만, 그에게는 그 '평범한 삶'을 위한 그 어떤 도구도 없었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던 지수는 결국 시스템의 명령(안분지족)을 거부하고 범죄를 저질러가며 본인의 목적을 추구한다.
시스템이 우리에게 안분지족을 강요하는 것은 분수 넘치는 삶을 살고자 개인이 몸부림 치면 칠수록 그 파동이 양자가 이중 슬릿을 불규칙적으로 통과하듯 파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지수의 욕망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 그래서 시스템은 욕망을 결핍감의 발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케 만든다.
시스템의 배후에 존재하는 기득권은 누구나 욕망할 수 있도록 자원을 분배하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욕망하는 개인의 삶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회를 고안한다. 욕망을 긍정했던 스피노자가 교황청으로부터 파면당하고 식색이 본성이라 주장한 허균이 거열형(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선고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가진 것 이상을 꿈꾸기 위해 파국을 만들어 낸 지수에게도 죄가 있지만, 가진 것 이상을 꿈꾸려면 파국을 겪을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시스템의 죄는 더 크다. 인간수업의 영어 제목인 'extracurricular',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죄와 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