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망치러 온 나의 대변인, 리비

연극 <마우스피스>, 우아하고 지저분한, 거칠고 섬세한.

by 밋너

※이 포스팅은 8번째 연극열전 두 번째 작품인 <마우스피스> 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all fur coat and nae knickers.”


모피코트를 둘렀지만 정작 그 안에 팬티도 안 입었다는 이 관용구는 때때로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과, 수도답게 스코틀랜드 제1도시로서 런던 못지 않게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부촌의 이미지로 익숙한 에딘버러. 그러나 그 모피코트 안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품위는 극히 표면적일 뿐. 글래스고 사람들이 즐겨 쓰지만 에딘버러 사람들도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는 이 말이 겨냥하는 건 결국, 에딘버러 남서쪽 모닝사이드를 비롯한 '고상한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이다.

IE002678415_STD.jpg 마우스피스 프레스콜 / 오마이뉴스
"아줌마 같은 사람들한테 딱 맞는 농담이 있는데, 아마 재밌을 거예요. 말 그대로 화장실 유머인데, 무이르 애랑 모닝사이드 애가 같이 화장실에 있어요. 옆 칸에 나란히 서서 시원하게 딱 싸고, 이제 무이르 새낀 털고 지퍼 올리고 나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모닝사이드 애가 그래요. '말도 안 돼, 너네 엄만 손 씻으라는 것도 안 가르쳐줬냐?' 이러는 거지. 무이르 새끼가 딱 돌아서서 대꾸를 해요. '아니, 우리 엄만 손가락에 싸지 말라고 가르쳤거든?'"
-<마우스피스> 中 데클란의 대사


연극열전의 올해 두 번째 작품인 <마우스피스>는 바로 이 에딘버러를 배경으로 한다. 줄거리는 간단한 듯 보이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다. 촉망받는 '차세대' 예술가이자 극작가였던 41세의 리비 퀸(김신록·김여진 분) 그리고 불안장애를 안고 있으며 어쩌면 '차세대' 예술가가 될 지도 모를 17세의 데클란 스완(이휘종·장률 분)이 서로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연히 솔즈베리 언덕에서 만나 '있을 법하지 않은(Unlikely)'*1 우정을 키워나가는 극. 이렇게만 설명하면 무척이나 훈훈하게 느껴지지만 결말까지 가는 시간 동안 둘의 우정은 복잡하게 변화한다. 그러나 메타 연극이라는 한 마디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이 극의 결말을 언급하는 건 객석에 앉아 보내게 될 100여 분 간의 신선하고 짜릿하며 동시에 끔찍한 시간을 훼손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므로(비록 오늘-2020년 9월 6일 기준-이 초연 총막일이지만 추후 재연, 삼연 혹은 그 이상의 관객들을 위하여) 가급적이면 그 내용 자체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가 이 극을 받아 들이는 방식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왜 우리는 하필 솔즈베리 언덕에서 만났을까

에딘버러 뉴타운의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흡사 말다툼하듯 나눈다. 데클란의 그림을 칭찬하던 리비가 그에게 커뮤니티에 대해 얘기하고, 데클란은 화장실에서 만난 무이르 애와 모닝사이드 애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자 리비는 데클란에게 "나는 모닝사이드 시발새끼가 아니야"라고 하고, 데클란 역시 "저도 무이르에 사는 거 아니거든요"라고 쏘아 붙인다.

무이르 하우스는 에딘버러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동네이자 가장 빈곤한 동네로 여겨지는 곳이다. 최근에는 재개발이 진행되는 중이라지만 마약 중독자들이 살고 반사회적 폭력 문제가 빈번하게 벌어져 골칫거리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닝사이드는? 에딘버러 남서쪽, 그린힐 아랫쪽에 위치한 부촌이다.

데클란 스스로도 "그렇게 막 재밌는 얘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무이르와 모닝사이드 얘기는 사실 우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 극의 정체성에 직접적으로 닿아있다. <마우스피스>는 그들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결국 중산층(Middle-class) 여성 리비와 노동 계급(Working-class) 소년 데클란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계급의 격차,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그로 인해 변해가는 것, 좌절하는 것, 그리고 파멸하거나 재생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기 때문이다.


808x449_cmsv2_0b81670c-0978-536c-9120-9c5fe69e3c4a-4329922.jpg 1980년대 무이르 하우스의 풍경 by Dr Roy Robertson


<마우스피스>의 극작가인 키어런 헐리는 1986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교사, 아버지는 비정부 기구(NGO) 소속으로 통계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누가 봐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헐리는 스코틀랜드 주립 학교에서 연극부에 가입했고 이후 글래스고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며 극작가의 길을 걸었다.*2 그러니까, 이 모든 외적인 요소들을 고려하면 리비는 누가 봐도 헐리에 가까운 캐릭터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더 스테이지'와 인터뷰에서 "나는 확실하게 중산층이었다"고 말하면서도 "스코틀랜드에선 수업을 받을 때 커뮤니티가 혼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노동 계급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갔고 런던의 극장에 갔을 땐 종종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사립학교나 그 비슷한 곳에도 가지 않았고, 그들처럼 내가 중산층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다"고 못박는다. 경제적 양극화가 극심한 에딘버러에서 태어나 살아온(지금은 글래스고로 이사했다) 헐리의 커뮤니티 아이덴티티는 중산층도 노동 계급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둘 다인 중간자적 양태를 취한다.

헐리의 고향이자 <마우스피스>의 배경인 에딘버러는 그런 곳이다. 에딘버러는 사회적 그리고 지리적으로 극단적인 장소로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서로 어지간해선 눈치채지 못할 수 없을 만큼 가깝게 살고 있는 도시다. 데클란이 말하는 무이르 하우스와 모닝사이드가 차로 불과 20분 여 밖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물론 그 안에서도 커뮤니티를 엄격하게 따지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31.jpg 마우스피스 프레스콜 / 스테이지키

어쨌든 중요한 건, 리비와 데클란이 '예술'이라는 본질 자체로 서로를 들여다보고 서로의 개체를 인식하기 위해선 완전하게 계급에서 벗어난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무이르 하우스든 모닝사이드든, 데클란이 사는(것으로 추정되는) 올드타운이든, 리비가 사는(역시, 그런 것으로 추정되는) 뉴타운이든 이 모든 '지역'과 '계급'의 격차가 무의미해지는 곳, 에딘버러에는 그런 곳이 있다. 발 아래로 동화책 그림처럼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만 가득한 곳. '여기'가 아니면 '저기'일 뿐, 무이르 하우스도 모닝사이드도 올드타운도 뉴타운도 없이 그저, 엽서 속 포스 다리, 리스 항구, 에딘버러성만 보이는 그 어느 계급의 공간도 아닌 모두의 솔즈베리 언덕. 이 곳에서 예술(데클란의 그림, 커트니 러브, 펄프, R.E.M, 홀…)에 대해 얘기할 때 둘은 중산층과 노동 계급 간의 층위를 벗고 예술이라는 하나의 논제에 몰두하는 개인과 개인이 된다. 이들이 솔즈베리 언덕에서 마약과 술을 나누며 하는 대화 중간중간 사용하는 언어들이 이를 방증한다. "몰라 씨발, 넘어가"/"몰라, 씨발, 넘어가? 존나 안 어울려요, 나랑 있으니까 그런 말투 쓰는 거예요? 그쪽 커뮤니티에서 그런 말투 안쓰잖아요"/"당연히 안 쓰지, 너도 게리한테 이런 말투 안 쓸 거 아냐?"/"당연하죠". 미들 클래스의 언어를 벗고, 워킹 클래스의 언어를 벗고 온전히 리비와 데클란으로 나누는 이야기들. 그래서 시작도, 끝도 결국은 솔즈베리 언덕이다.


주어진 시간은 이게 전부야,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자.

수많은 치명적인 대사들 중에서도, 결국은 이 것이다. 예술은 전혀 다른 계급의 두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둘 사이에 욕망을 일으키게 만들고, 어쩌면 사랑까지 닿게끔 만들지만 거기까지다. 극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날 것의 욕망이 꽉 찬 긴장감과 함께 흘러 넘치는데 어떤 캐스트는 이것을 한없이 나이브한 사랑으로 이끌고 또 어떤 캐스트는 갈라테이아에게 품는 피그말리온의 욕망과 같은, 파멸로 치닫는 욕망 그 자체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이 극 중 연출의 말대로, 혹은 누군가의 해석이나 우리의 판단에 따라 "결국 사랑 이야기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기엔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 지독한 '커뮤니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찾아온 데클란에게 리비는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극장은 리비의 세계이고, 리비가 속한 '커뮤니티'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데클란이 들어와선 안되고(그래서 그에겐 초대권조차 보내지 않았다) 머무르거나 목소리를 내서도 곤란하다(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야 하는 역할은 리비의 '특권'이었다). 그러니까 리비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커뮤니티 안에서 데클란과 대화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나가서,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리비와 데클란이 계급을 벗어나 대화할 수 있는 곳에서 둘의 이야기를 하자는 그 말은 그래서 명백한 선 가르기다.


200717165317216_w.jpg 마우스피스 프레스콜 / 뉴스핌

처음의 모피코트 얘기로 돌아가자. 모피코트 아래 팬티도 입지 않았다는 뜻은 결국 교양과 품위가 있고, 높은 학력을 자랑하는 에딘버러의 '고상한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은 표면적인 외관 아래를 들여다보면 결국 자신들이 그렇게 낮춰보는 반대편의 '천박한 커뮤니티'보다 더 품위가 없다는 걸 비꼬는 말이다. 부유한 척하고, 고상한 척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스스로도 "거지 같은 작품을 써 놓고 사람들이 제발 좋아해 줬으면 하고 빌"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알면서도, 결국 그 속에서 천착하게 되는 사람들. '허세를 부리고 그에 상응하는 성취도 없이 자랑스러워하는 스스로를 격렬하게 부인하는'*3 사람들, 그리고 리비. 왜, 데클란이 그러잖는가. "모닝사이드 시발새끼들은 자기가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는 걸 사방에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마우스피스>를 쓴 리비 역시 데클란의 삶을 훔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비극을 포장해 그가 속한 '커뮤니티'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해 사방에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모닝사이드 시발새끼들처럼.


그렇다면 데클란은? 리비에 의해 '목소리가 없는' 것으로 규정지어진 데클란은 워킹 클래스이자 소모되고 착취당하는 식민지와도 닮았다. 양극화된 에딘버러의 현실과 맞물려 그가 다니던 센터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재정난 때문에)문을 닫고, 반사회적 행동을 우려한 경찰의 서늘한 눈을 피해 아무도 오지 않는 솔즈베리 언덕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미완성의 예술가, 리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예술에 해당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할 수 없었던 무력한 소년. 11파운드 50센트가 없어 티켓을 살 수도 없었고 무직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할인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그는 리비로 대표되는 계급이 독식하고 있는 문화적 전유의 희생양이다.


img.jpg 문화웹진 지음 / 니트 (ziium@ziium.net)

에딘버러 뉴타운 카페에서 리비가 자신의 실패한 삶 이야기를 아주 격정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넘치게 쏟아내며 '예술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사람으로 살아올 수 있었는지 얘기하는 동안 데클란은 말을 잃는다. 목소리를 잃는다. 데클란에겐 리비가 쏟아내는 말에 돌려줄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센터에서 '흉내내기 놀이' 같은 거나 하고 불안장애를 해소하기 위해 마음 속에 있는 걸 그림으로 꺼내놓는 것으로 겨우 숨쉬던 데클란에겐 리비의 화려한 언어와 빛나는 과거와 있어 보이는 현재에 대응할 그 어떤 경험조차 없다. 그래서 데클란은 힘없고 무지하고 제 목소리조차 온전히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내겠다는 리비의 '선택'에 뒤따른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데클란은 주택단지 벽 안에 갇힌 갈라테이아, 그리고 리비에 의해 작동해 관객들과 심장을 맞추게끔 만드는 '거대한 공감의 기계' 그 자체다.

리비와 데클란이라는 개인의 이야기이자 지독히 계급적인 이야기인 <마우스피스>는 'class' 개념이 희박한 우리나라에선 미묘한 로컬라이징을 거친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빈곤은 에딘버러에서와 마찬가지로 길거리에서 자주 우리와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지만 그것이 어떠한 층위를 가지고 작동하는 게 보편적인 사회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예술적 무결성과 남용 사이의 경계'를 묻는 질문에 초점이 맞춰진 <마우스피스>가 어쩌면 더 본질적이고 커다란 울림을 주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이 2인극에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악을 수행하며 대적자로서, 안타고니스트로서 존재하는 악역은 <마우스피스>에 없다. 리비는 후반부에서 악역으로 받아 들여질 법한 선택과 행동을 반복하지만 그가 받아들이고 투영하는 욕망은 팬티도 입지 않은 채 모피코트를 두르고 있는 '누군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알려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어떤 것', 그 모든 것을 제멋대로 훔치고 이어붙이고 포장하고 소비하면서도 선을 가르고 '반대쪽'에 두어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고자 하는 '모두'에게 전해주는 현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극이 주는 불편함이 관객을 가해자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 결말로 치닫고 끝내 '암전'된 뒤에도, 리비가 '마지막 장면' 이후 극의 끝을 이야기하고 데클란이 '마지막 장면'은 끝났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 뒤에도 마찬가지다. 헐리는 말한다. "작가나 제작자, 혹은 미디어에서 검열관의 역할을 하는 게이트 키퍼나 극장 관계자들, 이 일을 시작한 모든 사람들과 관객들에 대해 비판적인 대화"지만 "이건 에세이가 아니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경험을 통해 감동을 받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들을 사랑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그들-리비와 데클란-과 사랑에 빠지기를 바란다"*4고.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껏 사랑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의 '마우스피스'가 되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EggP1_5UYAA6_Z-.png 트위터 @Oeksobedience


"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

"모두 다 괜찮아질 일은 없어"



*1), 4) 2019년 소호 극장 재연을 앞둔 인터뷰에서, 키이란 헐리. (Mouthpiece- An interview with writer Kieran Hurley; https://www.youtube.com/watch?v=aqNU4FdTAfg)

*2) THE STAGE(https://www.thestage.co.uk/features/theatremaker-kieran-hurley-anything-i-write-is-a-story-about-people-and-love-in-some-way) THE LIST(https://www.contemporarytheatrereview.org/2019/rantin-and-raving-an-interview-with-kieran-hurley/)

*3) 앨런 그랜트, "Scottish word of week: Aw fur coat, nae knickers" THE SCOTSMAN, 20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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