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괜찮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빠.

연극 <아들>, 아빠, 엄마, 아줌마,내 세계가 분해되는 소리가 들리나요

by 밋너

※이 포스팅은 8번째 연극열전 세 번째 작품인 <아들(Le Fils)> 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ㅡ내 세계는 어느 순간 완전히 분해됐어요. 아마도 그 시작은 색종이를 가위로 반으로 자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겠죠.

암전 후 한없이 밝은 어느 집의 거실, 불안한 모습으로 찾아온 전 아내 안느를 맞이한 피에르가 그들의 아들 니콜라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귓가에 속삭였다. 침착하고 느릿하며 높낮이가 없이 담담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착 가라앉아 불안한 느낌을 주는 소년의 목소리. 자기 손가락을 뜯고 손목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소년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말한다. "엄마는 그 날 이후 아빠에 대해 계속 나쁜 말만 했어요. 그런데 나는 아빠를 꽤 좋아했거든요." 물론 그 애는 엄마도 좋아했겠지.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순간 반으로 잘린 색종이처럼 됐어요. 아빠를 좋아하는 나와, 우리를 버리고 떠난 아빠에게 나쁜 말을 하는 엄마를 이해하는 나, 그러니까 아빠를 미워하는 나로. 색종이는 원래 한 장이었는데, 나는 두 장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계속 그렇게 반으로 잘려나가고, 잘려나가다보니 이제 너덜너덜해졌어요. 어느 게 원래의 '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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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의 올해 세 번째 작품인 <아들>은 섬세하면서도 건조한 이야기다. 작가인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3부작 중 가장 건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전작인 <어머니(La Mère)>나 <아버지(Le Père)>에 비해 조금 더 건조하게 여겨지는 건 <아들>이 3인칭으로 진행되는 탓도 있을 것이고, 가족의 이야기를 밖에서 들여다보는 형식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형식적인 이유 외에도, 이들을 둘러싼 공기 자체가 건조하기 짝이 없어 결국 모든 게 이토록 쉽게 바스러지고 만다는 것을 직감하게끔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린 그렇게 버려졌고 내 세계는 분해되기 시작했죠

<아들>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단순한 만큼 예상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만큼 고통스럽다. 불륜으로 가정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한 남자 피에르(이석준)는 그의 새로운 아내 소피아(양서빈)와 함께 아들 샤샤를 낳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극의 시작과 동시에 피에르의 전 아내 안느(정수영)가 찾아와 불안한 목소리로 그들의 아들인 니콜라(강승호, 이주승)에 대해 얘기한다. "나는 더이상 그 애를 감당할 수 없다"고. 그리고 이야기는 당연한 방향으로 흐른다. 니콜라의 주위에 있는 어른들은 우울증에 걸린 10대 소년을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돌려놓기 위해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피에르와 안느, 그리고 소피아가 고군분투하는 이 이야기는 즐거운 부분 하나 없이 꽉 막히게 현실적으로 흘러간다. 괴팍하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부자간의 유대관계에 결핍을 안고 성장한 피에르는 자신과 달리 "다 가졌는데"도 우울에 빠진 아들 니콜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버림 받은 충격과 이혼 후의 분리불안에 시달리는 안느는 아들 니콜라를 말 그대로 감당하기 버거워 한다. 피에르나 안느와 달리 니콜라와 완전히 '타인'인 소피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소피아는 남편의 아들을 대하는 가장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려 늘 노력하지만 '가족'의 외피가 그들의 관계를 감쌀 때마다 남편의 과거의 가족들에 대한 여유를 잃고 만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잘못이고, 모든 게 그들의 잘못이라기엔 누구나 할 수 있는 잘못들이라 현실적이다. 그 때 그 순간,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들이 결과적으로 최악의 결말을 가져왔을 때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은 그토록 매몰차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 때의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조금만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아들3.jpg 연극열전 제공

니콜라는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다.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아들이었던 니콜라는 어느 순간부터 안느의 말처럼 '다른 애들과 좀 다른' 아이가 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빠가 엄마와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가서 새 가족을 만들었을 때, 그래서 엄마가 사랑하는 아빠에게 '나쁜 말'만 하는 걸 지켜봐야 했을 때, 니콜라는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는 나와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는 내가 그 순간 갈라진 거죠. 둘이 된 거예요.』엄마를 위로하고 이해하기 위해선 아빠를 미워해야 하고, 아빠를 좋아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선 버려진 현실을 부정해야 하고. 니콜라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애의 세계는 바뀌고, 분해되고, 와해되기 시작한 거다. 소피아에게 "아빠한테 우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라고 묻는 니콜라의 떨리는 목소리 뒤에 있는 것은 비난보다는 어쩌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는 스스로에게 답을 찾아주려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니콜라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명확한 답 없이 점점 더 헝클어지는 자신의 불행에 묶여 그저 걷고 또 걷고, 빙글빙글 방 안을 맴돌며 한없이 깊은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갈 뿐이다. '꼬마 햇님'처럼 방긋 방긋 웃으며 피에르와 안느에게 행복만을 안겨줬던 아이의 세계는 그렇게 분해되고 와해되어 마침내 붕괴되고, 물에 녹아 경계조차 희미한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살아온, 살아가던, 살아갈 수 있었던 니콜라는 잘려져서 버려진 색종이 조각처럼 물에 둥둥 떠서 흘러가다 모두 녹아버렸고 남은 것은 더이상 살아갈 수 없는 니콜라의 조각 뿐이었다.


다들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요, 왜 그랬어요?

아버지의 '새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피에르의 집으로 온 니콜라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그 사람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니콜라의 자아는 그가 피에르의 집에 온 첫날부터 표출된다. 니콜라의 심상은 동생의 인형 꾸러미를 마구 내던져 바닥에 흩뜨러트리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내던지고 화분을 쓰러뜨리며 난장판으로 만든 피에르의 집 그 자체다. 불안정하고, 두려움에 가득 차있으며, 언제든 또다시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내려 위에 갈겨 쓴 '죽음을 기다리다(La Mort Attendra)'라는 그 문장만큼 니콜라의 상태를 잘 설명하는 장치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니콜라는 벌떡 일어나 거울을 뒤집어 벽에 세워둔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들2.jpg 연극열전 제공

그리고 그들은 정말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니콜라가 어질러놓은 상태 그대로인 피에르의 집에서 피에르와, 소피아와, 안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 보고 걸어다니고 대화를 나눈다. 바닥에 널려있지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인형들, 옷가지들, 책들, 화분, 그리고 종이쪼가리들. 니콜라의 우울과 고통은 그렇게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다. 니콜라 본인조차도.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니콜라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누가 자신의 우울의 근원을 명확히 들여다보고 왜 이렇게 힘든지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심지어 선명하게 눈치챌 수 있는 어떠한 신호조차도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어질러진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가족들처럼.

그러나 그건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다. 피에르가 니콜라와 대화를 하겠다고 둘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소피아는 침착하게 책과 인형들을 정리한다. 집에 찾아온 안느와 대화를 나누면서 피에르는 아무렇지 않게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 정리한다. 알고 있지만, 아는 척할 수 없었던 니콜라의 우울과 불안은 그렇게 '정리당한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것.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해답을 찾기 어려울 때 손쉽게 택하고 마는 선택지. 너 왜 그랬어, 가 아니라 지금 어떻니, 라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던 자신을 부정하는 선택지. 그렇게 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묻어두고 모른 척한 타인의 고통은, 난장판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니는 것처럼 슬프고 애처롭다. 그리고 그렇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무시한 결과와 마주한 순간 세계의 균열은, 타인의 고통은 내 것이 된다. 니콜라를 잃고 나서야 "살아갈 수가 없다"고 흐느끼는 피에르처럼.


다 괜찮아질 거야. 아니, 모두 다 괜찮아지는 일은 없어. 그래도... 괜찮아질 거야.

우울증에 시달리는 니콜라가 아버지 피에르에게 함께 살기를 요청하고, 피에르가 아들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 부탁을 들어주고자 소피아를 설득하는 과정은 지극히 미묘하다.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들의 최선을 다했는지, 극 내내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노력하는데 그것이 모두 서로에게 완전한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 채 어긋나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 걸 바라보는 건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정신적인 고통으로 몰아간다. 그 고통의 첨예한 칼날이 겨냥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기는 가족이라는 단위 내에서도 개인과 개인은 결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뼈저린 깨달음이다. 그 몸 안에 같은 피가 흐르더라도, 아무리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라 해도 '나'는 '네'가 겪는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너'를 보는 것은 '내'게도 고통이기에 우리는 말한다. "괜찮아, 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그저 '거쳐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이겨내고, 마주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놔버릴 수는 없어. 괜찮지? 정말로 모두 다 괜찮아질 거니까."

아들1.jpg 연극열전 제공

하지만 정말 괜찮아지는 것은 없다. 괜찮아지기를 바라며 건네는 그 말은 때론 괜찮아져야만 한다는 압박이 된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위로는, 그래서 때론 가장 날카로운 칼처럼 팔목에 리스트컷을 남기고 심지어 자신의 머리에 엽총을 겨누게 만드는 거대한 폭력이 된다. 어떻게 괜찮아져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괜찮아질 거라는 그 말이 수많은 니콜라들에게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 애가 피에르와 안느에게 차를 대접하고, 엄마 아빠가 좋아했던 마들렌을 놓아주고 "이제 됐다"고 웃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는 사이에도 피에르와 안느는 '모두 다 괜찮아졌어'라는 그 말의 마법을 신봉하고 있었다. 지금의 불안정한 땅을 비온 뒤처럼 단단하게 굳게 만드는 그 마법.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 뒤에 들려온 강렬한 총소리는 대답한다. "모두 다 괜찮아지는 일은 없어." 그래, <마우스피스>*의 데클란이 내뱉듯이, 통렬하게.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이 한 문장은 연극열전의 무수한 극들을 관통한다. <프라이드>에서 올리버에게 들려온 속삭임-"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은 불안함을 끌어안는 위안(혹은 자기위안)이었고 <킬롤로지>에서는 데이비에게 한 번도 주어진 적 없는 공평함-"아빠가 딸 머리를 쓰다듬으니까 애가 아빠를 올려다봐요. 아저씨는 억지긴 해도 미소로 답해줘요.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는 듯이.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 미소"-이었고 <마우스피스>에서는 그 허무한 다독임에 비통한 절규로 되받아친다-"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일은 없어, 만약 모든 게 괜찮아질 수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한테 좀 보여줘!".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마음이 거짓인 것은 아니니까. 온전히 타인이 될 수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을 건네며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여전히 갈망한다. 너의 세계가 더이상 분해되지 않기를, 네가 정말 괜찮아지기를, 우리 모두가 정말 모두 다 괜찮아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연극열전은 여기서 한 마디를 더, 아주 꾸준하게 보태는 것이다. "그러니 다 괜찮아질 수 있도록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자"고. 내가 너를, 아버지가 아들을, 강자가 약자를, 안정이 불안정을, 다수가 소수를.


*<킬롤로지>에서 데이비가 죽고 난 뒤에야 열 배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꿈꿨던 알란의 모습이, 니콜라가 죽고 난 뒤에야 자신이 조금 더 그 애의 말에 귀기울이고 이해해줬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환상을 보는 피에르의 모습과 겹쳐보이는 건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주제 넘게도, 이석준 배우의 멘탈이 더할 나위 없이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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