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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r 04. 2021

<신 고질라>인간이여, 괴수를 이용하지 말 것

영화 다시 읽기, 예전에 본 것들에 대하여

보드카를 마시면서 신고질라를 봤다. 오카모토 키하치에 초기 봉준호를 섞어 안노 히데아키식으로 나눈 영화같다. 이건 재난영화이자 괴수영화이면서 동시에 둘 모두가 아닌 그런 영화였다. CG를 쓰면서도 구태여 그 시절 괴수군단 대백과의 느낌을 살린 외관을 구현해낸 안노 히데아키의 변태스러움은 일종의 리스펙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보다 인간의 대응에 초점을 맞춘 건 트래디셔널이다. 오프닝부터 초반 20분 관료제를 있는 힘껏 비웃는 모습이 좋았는데 이 냉소주의 자체는 에반게리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여러 가지 의미로 흥미깊다. 특히 야시오리 작전은 놀랄만치 야시마 작전을 빼닮아서 조금 김이 빠질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전세계의 그 수많은 괴수영화 주인공들이 비행기를 몰고 배를 몰고 또 로봇을 모는(심지어 기본적으로는 그 권력을 정부에게서 이임받았음에도 불구하고)반정부적, 반체제적인 기본 '민간인'에 가까운 성격이었던 것에 비해 신고질라는 정부의 젊은 피(...)에 구원의 핵심을 맡겼다는 부분도 그렇다. 이카리 신지와 아야나미 레이, 그리고 하프인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가 '민간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지 그 부분을 따져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앞에서 초기 봉준호 얘길 했는데, 적어도 괴물은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미국을 적대화하진 않았다. 블랙코미디는 속은 투명하되 겉은 거칠해야 제맛인 법이다. 투박하다는 게 아니라 안을 멀쩡히 들여다보면서도 손대기 어려운 따끔한 외피를 갖춰야 매력적이란 말인데 신고질라는 지나치게 투명하다. 2D 그리고 근미래의 세계에서 침잠해있던 피해의식은 현대의 일본, 파괴된 가스미가세키를 대체하는 야구치라는 신 인물(ㅋㅋ)에게서 지나치게 투명하게 드러나서 보고 있자니 조금 낯부끄럽다. 드라이한 서사가 점차 모이스쳐하게 치닫아가는 모습은 에반게리온의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켜서 보는 이 쪽이 몸둘 바 모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신고질라의 괴수는 이제까지(CG의 여력이나 그 고전적 트래디셔널리즘) 불가능했던 영역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초자연적인 면모를 보인다. 초자연적으로 '강하다'가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강하다는 의미다. 고질라는 동일본을 덮친 쓰나미이고 그로 인해 열도를 공포로 휩쓴 방사능이다. 괴수가 고질라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거대미확인괴수로 불리는 1급 재해였던 것처럼 동일본 대지진 역시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알고 있었음에도)그 미지의 강대함으로 인해 완벽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한 불가항력의 재해였다. 고질라가 처음 등장해 카마타에 상륙하면서 벌어지는 건물들의 참사, 강변을 거슬러오르며 제방을 타고 오르는 보트들의 파도, 가와사키를 지나 세타가야에 진입해 도내를 활보할 때 벌어지는 잇딴 정전에서 311의 공포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에 대처하는 인간, 아니 정부의 무력함까지 포함한 모든 것이 그렇다. 어찌보면 그 무력감에 대해서는 311을 겪은 사도를 보는 느낌도 드는 것이다.


재난을 이겨내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온다. 강두는 괴물이 죽은 뒤 현서가 살려낸 아이와 괴물이 없는 강변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 죽은 자들은 합동분향소에서, 그리고 눈내리는 한강 고수부지에서 끝까지 존재한다. 반면 고질라는 살아남은 자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구치는 (당연하게도)차기 총리라는 미래와 직면하고 구제소의 사람들은 살았다는 현실에 환호한다. 야구치는 야심만만한 표정으로 아직 사태는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다는 대사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건물의 철골구조처럼 흉물스러운 고질라의 모습을 끝으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은 헐리웃의 그것처럼 낙천적이다. 물론 그조차 어떤 의미로는 트래디셔널하다.


아카사카는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은 스크럽 앤 빌드로 성장해왔다"고 말한다. 파괴된 것은 다시 창조한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재난 영화와 괴수 영화를 볼 때 생각하는 것들이다. 저 참담한 현장을 대체 어떻게 다시 복구할까... 스크럽 앤 빌드에는 그걸 해본 자들의 자신감, 그리고 오만이 다 담겨있다. 스크럽당한 사람과 빌드하는 사람이 동일하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안다.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신고질라는 퍼시픽림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영화인 것이다.


이상 괴수가 주인공인 괴수 영화를 보고 싶었던 사람의 투정. 

/ 201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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