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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Apr 01. 2021

그는 자신을 잊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4월 1일, 일을 그만 두고서야 다시 쓰게 된 장국영 추모사

한동안 꽤 꾸준히, 장국영에 대한 글을 쓰던 시기가 있었다. 소위 말하는 청춘의 열병을 앓고 있던 시기에 그는 내게 첫사랑과 이별과 지독한 우울과 격렬한 고통을 대변하는 하나의 기호적인 신화였고, 그가 세상을 등지는 방법으로 우리와 이별을 선택했을 때 나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첫사랑에 그를 대입하며 장국영의 부재와 텅 빈 공동처럼 변해버린 내 사랑의 폐허에 서서 끝없이 울었다. 그래서 그 뒤로 매년 그의 기일마다 꼭 제사라도 치르듯이 그가 나온 영화를 한 편씩 보면서 이제 더이상 세상에 없는, 그러나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장국영에 대한 그리움을 곱씹었다. 만우절, 달력에 따로 표시되지도 않고 빨간 날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364일(가끔은 365일)들마다 매년 반복해서 찾아오는 그런 날 중 하나일 뿐이지만 통념적으로 거짓말이 허락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가 자정부터 들뜨곤 하던 날. 하필이면 그런 날 세상을 등진 남자를 떠올리며 그의 생을 반추하고 그가 남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지독한 자기 합리화이자 동시에 자기부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샌가, 그의 기일을 눈 감고 지나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더이상 그를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장국영을 그리워하며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그의 영화를 본다. 단지 그 행위를, 4월 1일에 어떤 의무감에 따라 하지 않게 됐을 뿐이다. 아마도 사는 게 힘이 들고, 그의 기일을 기리며 슬픔과 우울에 젖어 지내기엔 내 삶과 일이 나를 뒤흔드는 시간이 늘어난 탓일 게다. 쏟아지는 일 속에서 하루하루 무력해져가는 나와는 달리, 스크린 속의 그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눈빛으로 그 시간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게 가끔은 너무 괴로웠다. '아비정전'의 아비나, '천녀유혼'의 영채신, '금지옥엽'의 샘, '종횡사해'의 제임스, 그리고 보영과 아걸, 데이까지 내가 사랑했던 그 수많은 영화들 안에서 움직이고 걷고 말하며 살고 사랑하고 죽는 장국영을 지켜보는 지금의 내가 너무나 달라져버렸다는 걸 깨닫게 해주니까. 그래서 한창 바빠진 일과 일 때문에 생긴 무기력증의 핑계를 대며 나는 매년 4월 1일을, 마음 속으로 장국영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른 뒤 흐르는 빗물에 씻어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난 시간들이 벌써 3년이 지나 어느새 4년째. 나는 조금 방심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그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0.5초 안에 우울과 애틋함을 번쩍배달해주던 첫사랑이 길고 긴 시간을 지나 흐릿해져 결국 거의 잊혀진 것처럼, 장국영 역시 그렇게 잊어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녀유혼' 재개봉,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개봉, 왕가위 특별선 개봉 소식에 마스크를 두 겹이나 챙겨쓰고 득달같이 극장으로 달려나가면서도 감히 내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거다, 어리석게도.


그의 기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나는 내 지난 10년을 정리하고 일을 그만두었고 지금 제주도에 잠시 내려와 살고 있다. '산다'라는 말을 붙이기엔 어설프지만 내가 살고, 일을 하던 흔적으로 가득한 서울을 떠나 푸르고 파랗고 가끔은 아주 새카맣고 반짝이기까지 하는 이 아름다운 산과 오름과 바다와 곶자왈이 가득한 땅에서 나를 뉘여놓고 쉬게 하고 있다. 가끔은 지칠 때까지 걷고, 가끔은 헉헉대며 산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일을 한다는 것'.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하며 머리를 비워내는 중이다. 그렇게 '일'이 빠져나간 머릿속 빈 공간들엔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잊으려고 하거나 잊은 줄 알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장국영이었다. 


강풍과 함께 비바람이 부는 서귀포의 한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며 나는 머릿속으로 오늘밤을 상상한다. 나는 비좁고 초라한 이곳의 임시 거처에서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장국영의 영화를 보며, 그가 좋아했던 대하 대신 딱새우를 먹을 것이다. 무슨 영화를 볼 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울 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게 자신을 잊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떠났다는 사실을 이렇게 다시 깨닫게 되었으므로. 아마 앞으로도 계속 나는 그를 잊으려조차 하지 않고 매년 4월 1일에 그를 생각하고 말 것이므로. 그렇게 울게 된다면 그 눈물의 성분은 필경 슬픔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건 순도 100%의 그리움과 누구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장국영이라는 존재의 반짝임으로 가득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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