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렁스> 비겁할 지도 몰라, 그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이 포스팅은 8번째 연극열전 오프닝 작품인 <렁스> 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긴 글을 쓰는 것이 어색해지고 있다. 아마도 너무 짧은 언어들로 짧은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게, 쏟아내는 언어들의 짧고 굵은 장마비 속에서 한없이 두들겨 맞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연극열전 극들은 그런 기분일 때 나를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넌 이미 알고 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뭘까.
남자의 이야기도 아니고 여자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였다가 '너'와 '내'가 되고 다시 '우리'가 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이케아 한복판에서 툭 던진 남자의 말, 아이를 갖자. 그 한 마디에서 시작된 대화의 홍수. 그것은 대화이기도 하고, 대화가 아니기도 하고, 혼잣말이었다가 때로는 울부짖음이 됐다가 비난 혹은 비판이 되고 그리고 서로를 상처 입히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가 이내 두 팔을 크게 벌려 서로를 보듬어주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여느 희곡집 두세 배는 될 정도로 두터운 대본이 보여주듯이, 흔한 도구나 소품 하나 없이, 배경도 음악도 최대한 절제된 텅 빈 공간 위에서 쏟아내는 둘만의 대사로 100분을 가득 채우는 이 연극은 아프고 사랑스럽다.
우린 좋은 사람이야.
우리,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난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금 난 너무 사악해. 아니, 난 원래 사악했어.
아이를 낳자. 남자가 던진 그 한 마디 말에 '우리'가 내뱉은 모든 말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과 너무나 먼 곳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사라진다. '우리'가 '너'와 '나'의 2인 공동체에서 벗어나 3인의 가족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라는 그 말로 인해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인생을 돌아보고 서로의 지향점을 되새기게 된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 임신이라는 것 자체가 막연하기만 한 그 순간에도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에 찾아올 변화를 직감하고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우리는 운전하고, 비닐봉지를 쓰고, 에어로졸 스프레이를 쓰고 또 아보카도를 먹는 사람들이지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아이를 낳는 건 지구를 위해서 좋은 일일까? 사람들이 말하잖아, 지구를 위한다면 자살하라고! 그러나 거대한 명제들 사이로 몸을 숨긴 여자의 두려움은 가장 개인적인 것에 기인한다. 지구를 파괴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몸이 파괴되는 것을 생각한다. 남자는 자궁이 없으니까,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남자의 걱정은 피상적이다. 여자의 과호흡, 불안한 정서, 신경증,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이해하려 노력해온 것처럼 이번에도 남자는 임신을 두려워하는 여자를 이해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의 영역은 원한다고 해서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해하고 싶었을 거다, 남자는.
이해받고 싶었을 거고, 여자는.
그러나 '우리'는 결국 '너'와 '나'의 집합체일 뿐이다. 우리라는 단어는 그렇게 공고하게 결속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너'와 '나' 사이를 보다 단단히 연결하기 위해 가족이라거나 연인, 친구, 대충 그런 종류의 단어들로 이름을 붙여 서로를 떨어질 수 없게 묶으려 한다. 하지만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모든 관계의 매듭은 아주 사소하게 풀릴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너'와 '나'로 해체된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채 둘의 사이를 아이로 매듭지으려 했던 여자와 남자는 아이를 잃는 순간 그 매듭을 서로 끊어버렸다. 그 매듭에 너무 많은 것들을 내어주었기에, 아이를 위해 너무 많은 영양분을 모아둔 태반과 탯줄이 끊어지듯이. 어쩌면 남자도, 여자도. 아이가 생긴 그 순간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보다 조금 더, '우리'가 '우리'로 버티기 위한 노력을 아이에게 의존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전까지는 '우리'인 '너'와 '나', 둘만으로 충분히 지탱할 수 있었던 이 관계에 아이라는 '제3자'가, 세 번째 사람이 생겨나고 사라진 자리가 고스란히 남아 그들 사이의 균열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이건 일종의 길항작용인지도 모른다. 여자와 남자는 '우리'에서 떨어져나온 '너'와 '나'라는 조각이 된 뒤에도, 거울 뒤에 쩍쩍 달라붙은 아교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미련을 지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와 자고, 약혼을 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구여친과 바람을 피운 남자. 다른 남자와 키스조차 하지 않고, 섹스는 더더욱 하지 않고, 어쩌다 한 번 눈길을 돌려볼라치면 최악으로 헤어졌던 구남친보다 더 최악인 것처럼 보이는 남자들만 보여 끝내 남자에게 돌아온 여자. 익숙한 것이 더 편하다거나, 그 때의 우리만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거나. 그런 건 그저 로망스를 꿈꾸는 헛된 수식어고 엉망진창이 된 관계를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이다. 증오는 욕망을, 욕망은 관성을, 관성은 과거를, 과거는 미래를. 서로가 서로의 안타고니스트였던 두 사람은 그들이 나눴던 그 언젠가의 대화 혹은 변명처럼 서로에게 도피한다. '우린 좋은 사람일까?' '히틀러도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야' '히틀러는 질문이나 대화 따위 하지 않았겠지! 그런 거 없이 확신했을 거야!' 그리고 해체되었던 두 조각의 '너'와 '나'가 '우리'로 다시 접붙는 그 순간 남자는 속삭인다. 예전처럼 따위는 불가능하니까 아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예전의 그들이 나누고 공유했던 사랑의 기억을 불어넣는다. 여전히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우리는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조용하고 나긋하게.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말야, 우린 아직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 하지만 그러면 어때, 적어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자기 위안은 얻을 수 있겠지. 암전 직전 마지막 순간 남자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여자의 얼굴에 드리운 세월 속에 담긴 것들처럼. 그게 나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 어쨌든 그들은, '우리'는, '너'와 '나'는- 사랑했는데. 사랑하고 있는데. 렁스는, 그 지독한 자기모순과 작고 속상한 고통들 사이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작은 얼룩, 사랑이라는 그 얼룩에 대한 이야기인데.
하나 더, 렁스를 연출한 박소영 연출가는 프레스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대본을 받아봤을 때, 여자와 남자가 좋은 사람에 대한 얘기 많이 하지만 둘 다 모순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상적인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불편한 부분을 없애고 각색해야할 지 아니면 온전히 그려야 할 지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러나 배우들과 얘기하면서 결국 그 모순적인 부분들조차 우리와 굉장히 닮아있었다는 점을 더 깨달은 것 같다. 그들의 모습을 온전히 올리자, 미화시키거나 비난하거나 옹호하지 말고 온전히 그들 자체로 무대에 올리자. 그렇게 해서 오히려 관객들이 자기 자신과 닮은 부분을 찾을 수도 있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대한 그들 자체의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고 온전히 올리는데 포커스를 뒀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상 유일한 무대 연출인)신발의 의미는, 그들의 발자취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을 살아오며 그들이 겪었던 한 지점들, 전환점이 되는 부분들에 신발을 나열하고 걸어가는 모양으로 (발자국처럼)찍어서 마지막에 이 모든, 공연 자체가 둘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고 삶의 모습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두 배우는 무대에서 한 번도 사라지지 않는다. 암전도 등퇴장도 없는 극, 온전히 배우 둘로만 채워졌던 공연에서 신발이 하나의 길로 쭉 걸어가는 것 자체를 상징적으로 찍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