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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Dec 16. 2022

버러지는 빛나기라도 하지

웃음과 쓴웃음 교차하는 연극 <빛나는 버러지> 

※스포일러 없습니다.

※서울자치신문 공연 섹션에 기고한 리뷰입니다.(원문 보기)


웃어야 하는 장면에서 쉽게 웃을 수 없다. 무심코 웃었다가 쓰라린 자기혐오를 경험한다. 극이 펼쳐지는 120분의 시간 동안 웃음과 쓴웃음이 서로 바통 터치를 한다. 거리두기와 동일시를 번갈아 경험하는 사이, 객석의 '나'는 극이 끝난 뒤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지난해 2021년 ‘극단 햇’의 리딩 공연 이후 ㈜엠피앤컴퍼니가 기획, 제작을 맡아 선보이는 연극 ‘빛나는 버러지’는 유쾌하고 잔혹한 블랙 코미디다. 연극 ‘빈센트 리버’의 작가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필립 리들리가 쓴 희곡으로, 2015년 영국 런던 소호에서 초연돼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극의 구조는 생각보다 간결하다. 온통 새하얀 무대 위 등장한 두 명의 남녀, 질(송인성, 최미소 분)과 올리(배윤범, 오정택 분)가 자신들에게 일어난 독특하고 기이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러시아 마약상 이웃과,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쥐로 대표되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던 질과 올리 부부는 어느 날 시청에서 날아든 편지 한 장에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는다. 3베드룸 신축 주택을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미스 디(황석정, 정다희 분)의 제안은 질과 올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다소 수상쩍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공사가 덜 된 집에서 잠들려던 이들 부부는 집에 침입한 노숙자를 쫓아내는 과정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노숙자의 시체는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에는 질과 올리를 위한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빛나는 버러지’는 전 세계 모든 대도시가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인 주택 대란을 대전제 삼아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능숙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 코드와,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질과 올리, 그리고 후반부의 백미 가든파티 장면을 소화해낸 뒤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며 ‘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올리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던 관객들은 질과 올리의 질문이 자신들을 향할 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된다. 가시적인 폭력과 도발은 덜할지 몰라도 메시지를 깨달을 때까지 관객을 두들겨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는 ‘In-yer-face theatre’ 그 자체다. 


120분의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배우들의 열연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이 극의 강점 중 하나다. 질과 올리를 연기하는 송인성, 최미소, 배윤범, 오정택 4명의 배우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무대 밖 관객들에게 질과 올리의 경험을 전도시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이 후반부로 흘러갈수록, 관객들은 점점 더 질과 올리(가 상징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여기에 이 경계를 교묘하게 휘젓는 두 명의 미스 디, 황석정과 정다희가 선보이는 냉엄한 개성이 덧입혀지면 우리는 극이 끝난 뒤 박수를 치며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충분한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우리는 정말 버러지보다 나은 존재들일까? 적어도 버러지는 빛나기라도 하는데 말이다. 


*연극 ’빛나는 버러지‘는 내년 1월 8일까지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빛나는 버러지>를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 가끔 이렇게 잘 만든 따끔한 극을 보고 싶다. 무엇보다, 아무 것도 없는 무대를 꽉 채우는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를 감상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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