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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r 02. 2023

제 손발이 따로 놀고 있는데요

#2. 오른손 왼손 각각 다른 드럼을 치면서 발로 페달을 어떻게 밟아요?

레슨을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월 6일에 상담받으려다가 개인적인 일정(=미룰 수 없는 술약속)이 생겨서 상담을 9일로 바꿨고, 상담 받은 그날 그 자리에서 바로 한 달치를 긁었지만 당장 수업을 시작하진 못했다.


원래는 설날 연휴 이전까지는 이것저것 약속이 많았기 때문에 연휴가 끝난 뒤 월요일, 그러니까 1월 30일에 첫 수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내 수업을 봐주기로 했던 선생님 댁에 일이 좀 생겨서 첫 레슨이 불발됐다. 저런. 어쩐지 연락이 없더라니. 하지만 그다음주는 일찌감치 잡혀있는 선약이 있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레슨은 2주 뒤로 밀렸다. 첫 레슨인데!


그래서 결국, 내 기념비적인 첫 레슨은 수강료를 결제한 날에서 한 달 넘게 지난 2월 13일에 시작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사이에 내가 드럼을 배우기로 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까먹고 있었다. 한 달은 긴 시간이니까, 아무렴. 그러다 첫 레슨날 오전, 선생님이 보낸 문자에 '아, 맞다.' 하고 박터지는 소리를 하며 퇴근 후 어슬렁 어슬렁 연습실로 찾아갔다.


'우와... 어색해...'


방음문과 방음벽으로 차폐되어 있지만 그래도 새어나오는 소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잔잔히 들려오는 뚱땅뚜다다당, 프로페셔널한 드럼 소리를 들으며 약간 쫄았다. 나같은 박치에 타악기라곤 손에 대본 적도 없는 생초짜 노비스가 이런 데 와도 되는 것인가? 감히 드럼 스틱을 손에 쥐어도 되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제 능력 밖인 것 같습니다' 어쩌구 하며 환불 받고 그 돈으로 치킨이나 사먹는 게 나은 건 아닌가!? 계단을 내려와 지하 1층, 신발장에서 게스트용 슬리퍼로 갈아신고 쭈뼛대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졘장.


선생님에게 정신적으로 붙들려 의자에 앉혀진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였다. 좋아하는 밴드의 뮤직 비디오에서나 보던 드럼. 가까이서 처음 본 건 <온 더 비트> 무대 위였지. 바로 그 드럼이 지금 내 눈 앞에 있었고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드럼 스틱을 쥐고 있었다. 아니, 이게, 잠깐, 저기요.


킥(베이스), 스네어, 하이탐, 미들탐, 로우탐, 그리고 하이햇, 크래쉬, 라이드. 드럼 한 덩어리를 이루는 각 부분들의 명칭을 한 번 후루룩 읊고, 각각의 부분들이 악보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설명한 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자, 그럼 이제 쳐볼까요^-^?"


네?


"제가 이 녀석(드럼)을 감히 이걸로(드럼스틱으로) 때려도(쳐도) 될까요?"


공포에 휩싸인 나를 향해 선생님은 한없이 상냥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자비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아, 그렇구나. 내가 쳐도 되는구나. 소심하게 오른손에 쥔 스틱으로 스네어 드럼을 한 번 퉁, 쳤다. 당연하게도 소리가 났다. 내가 늘 듣던 드럼 소리와 유사하지만 조금 빈약한 소리. 선생님은 칭찬하는 INFJ처럼 내가 소리를 냈다는 사실 자체에 "짜란다 짜란다"하셨고 나는 칭찬받아 날뛰는 ENTP답게 그 칭찬에 용기를 얻어 드럼을 더 세게 때렸다. 퉁!


퉁!

퉁!

퉁!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전율이 올라왔다...고 하면 너무 과장 같을까? 하지만 내게는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늘 듣던 음악의 화려한 일렉 기타 선율 아래, 묵직한 베이스 사운드 아래, 저릿저릿한 보컬의 목소리 너머 웅장하고 규칙적으로 깔리던 바로 그 드럼 사운드가 내 손에서 만들어지는(물론 퀄리티 차이는 엄청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지만) 순간이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까. 좀 과한 감동에 벅찬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와, 선생님, 제가 소리를 냈어요!


"그럼 이제 이거 쳐볼까요~"


앗, 이제 스네어 드럼 한 번 쳐봤을 뿐인데. 냅다 하이햇을 가리키는 선생님의 손짓에 나는 목까지 차올랐던 감격이 단숨에 위장까지 꺼져내리는 것을 느끼며 낑낑거렸다. 챙챙, 페달을 밟고 클로즈 모드로 하이햇을 챙챙 치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거 따로 따로는 제법 할 만한데.


멍청한 생각이었다. '나 이제 좀 행복해진 것 같아'라고 웃으며 돌아보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됐던가. '우리 이제 살아남은 거지?'라고 묻는 공포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떻게 됐던가. '이 정도는 해볼 만하지'하며 도전에 나선 리얼리티쇼 참가자들은 또 어떻게 됐던가.


"그럼 이제 여기 보세요~ 킥 페달을 밟으면서~ 여기 같이 치시고~ 여기서는 이걸 쳐야하죠?"


오른발 킥X오른손 하이햇-오른손 하이햇-왼손 스네어X오른손 하이햇-오른손 하이햇, 그리고, 킥, 킥, 하이햇, 킥, 하이햇, 스네어, 킥, 킥, 스네어... 아이고, 잠깐만요! 오른손 왼손이 정신없이 꼬이고, 드럼 스틱이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킥 페달 위에 놓인 오른발은 자꾸 미끄러지고. 빨판이 서로 엉켜 달라붙은 세발낙지처럼 내 손은 서로 뒤엉켜 스네어와 하이햇 사이를 방황하고, 퉁!하고 묵직하되 경쾌한 소리를 절도있게 내야 할 킥 드럼은 투루루루룽... 하고 맥없이 꼬리를 끌며 흐지부지됐다.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봤지만, 선생님은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띄운 채 "짜란다 짜란다"를 반복하고 계실 뿐이었다. 쌤, 저 진짜 잘하고 있는 거 맞아요? 저기요, 손발이 따로 움직이고 있는데요! 물론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렇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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