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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r 28. 2023

김찬호, 인외의 아름다움을 가진 휴머니스트

 제가 이런 이미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움을 더 잘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이미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 샤픈 따위 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부리부리한 눈매와 대비되는 색이 옅은 홍채, 뚜렷한 이목구비, 활짝 웃고 있는 입을 따라 단단한 선을 그리는 악관절. 콜타임에 맞춰 메이크업을 마치고, 지금 당장이라도 곧바로 무대에 올라갈 수 있게 첫 등장 때 입는 무대의상 차림으로 그 위에 갈색 코트만 하나 걸치고 앞에 앉아있는 배우 김찬호의 이미지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단연 '화려함', 수식어 하나를 굳이 더 붙이자면 '인간이 아닌 듯한 화려함'이 되겠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아닌 역할을 참 많이도 맡았다. <더맨인더홀(2016)>의 늑대, <록키호러쇼(2017, 2018>의 리프라프(2019년 공연에서는 프랑큰 퍼터를 맡았지만 그 역시 인간이 아니기는 마찬가지...) <마마 돈 크라이(2018, 2021)>의 백작, <더데빌(2018, 2021)>의 X-Black, <그림자를 판 사나이(2019)>의 그레이맨, <미드나잇:액터 뮤지션(2020)>의 비지터까지, 아주 다채로운 '인외'를 골고루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의 필모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가 꼭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외'의 길만 걸어온 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당연하다, 그의 말마따나 데뷔 17년차, 60작품 넘게 한 배우니까.) 그리고 그는 인외일 때만큼이나 인간일 때도 충분히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라는 것도, 그의 작품을 많이 봐왔기에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휴머니즘과 광기 사이, 그 어딘가에서

연극부터 뮤지컬까지,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김찬호가 출연한 작품을 많이 봤던 것 같다. <은밀하게 위대하게:THE LAST>의 원류환 역을 맡은 그와, 인터뷰를 위해 처음 만나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무대 위의 김찬호를 많이 봐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대 밖에서도 여전히 밝고 쾌활하며, 불혹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청춘' 같은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사람이라 다소 놀라긴 했지만. 


"저 슬픈 영화 보고 자주 우는 편이에요."
"주로 어떤 영화를 보고 우세요? 가장 많이 울었던 영화라거나…" 
"예전에 <파이란> 보고 엄청 울었어요. 또, 일본 영화 중에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이라는 영화 아세요? 그거 보고도 엄청 울었고요. 웬만큼 슬픈 영화는 보면 다 울어요, 저항 없이 우는 편이죠."


그래서 이런 대답에도 조금 놀랐다. 40여 분 남짓 이어진 인터뷰를 통해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굉장한 휴머니스트이자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 잘 운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김찬호는 이날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꼽았는데,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화를 보고 잘 울지 않는 나조차도 <인생은 아름다워> 마지막 장면, 아들 앞에서 보여주는 귀도의 행진 씬을 보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는데, 이 사람이라면 아마도 펑펑 오열하지 않았을까. 


그의 휴머니스트적인 속성은 인터뷰 내내 가감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싶고, <너는 내 운명>의 순박한 시골 청년...이 아니라 아저씨, 김석중 같은 역할도 하고 싶어한다. ▶[캐스팅보드] 김찬호, '은밀하게 위대하게:THE LAST'를 말하다(ft.스포일러)① ▶[캐스팅보드] 김찬호, 김찬호를 말하다②  <은밀하게 위대하게:THE LAST>의 매력으로는 재미와 감동 가득한 드라마를 꼽고,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 소시민들이 그려내는 페이소스 가득한 드라마가 주는 역설적인 기쁨을 한껏 사랑한다. 더 나아가 '배우 김찬호'라는 브랜드의 가치로 '자신이 가진 휴머니즘과 같은 에너지'를 첫 손에 꼽기도 한다.


"원류환 입장에서는 순임이든 두식이든 이용하려고 왔고, 실제로도 이용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인간적으로 정이 들었겠죠. 내가 가질 수 없는 평범하지만 소시민적인 삶,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걸 보면서 더더욱 자신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감정들이 극 안에서, 서서히 제 마음 속에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드라마가 더 짙어지는 거죠. 이 극의 그런 부분들이 참 좋아요."

"이 작품을 하게 되면서 느끼는 거지만,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사람들은 다들 망각하고 살죠.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다들 그러는데 큰일없이 잔잔하게 평범하게 사는 게 정말 뜻깊고 소중한 거라는 걸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돼요."


하지만 그가 마냥 말랑하고 따뜻한 휴머니스트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인터뷰에서 스스로 말했듯, <은밀하게 위대하게:THE LAST>팀에서 손꼽히는 광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무대에 서는 배우가 어느 정도 광기 없어서야 그것도 안 될 말이지만, <은위> 홍보를 위해 KBS <불후의 명곡>에 리해랑 역 이창민, 서동진 배우와 함께 출연한 영상을 보면 광기의 레벨이 일반인의 기준을 훌쩍 넘어선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하물며 서동진은, 일전 <아킬레스> 인터뷰를 비롯해 여러 차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쉼없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기를 자랑해 온 배우인 만큼 더더욱...)

이날 인터뷰에서도 살풋 그의 '광기'를 느낀 지점이 있었다. 꼭 다시 해보고 싶은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중이었다.


"그럼 배우님은 지금까지 해왔던 역할 중 꼭 다시 해보고 싶은 역할 있으세요?"
"여러 작품에 애정이 있죠. 그 중 몇 작품만 얘기하자면 우선 <미드나잇(액터뮤지션)> 너무 재미있었고요. 매일 다른 공연을 보여드렸어요. 그리고 <베헤모스>, 이것도 너무 재미있었고. 또 선배님들이랑 했던 <바냐와 소냐와 마사와 스파이크> 재미있게 했었고. 뮤지컬도 좋아하지만, 연극을 좋아해서 기회가 되면 연극을 또 한 번 하고 싶어요."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배우님을 무대에서 처음 본 건 연극이었던 것 같아요."
"진짜요? 뭐지? <히보(히스토리 보이즈)>? (이쯤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컨(어나더 컨트리)>?"
"엇... 뭐였더라."
"(이쯤부터 도전 골든벨 분위기가 되었다)<데스트랩>! <조제(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배우님 눈에 광기가... 아, 조제... 조제였던 것 같아요."
"아~ 조제였구나~ 다른 건 안 보셨어요?"
"<보도지침>도 봤고요..."


이 대화를 텍스트로 옮겨놓으니 그의 소소한 광기가 잘 느껴지진 않는군. 하지만 그(+이창민, 서동진)의 광기가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불후의 명곡>에서 그들이 나온 부분은 편집 없이 거의 그대로 송출됐다는 점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밖에도 몇 가지가 있는데, 전설적인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 역을 맡았던 <니진스키>, 고강도 안무가 계속 이어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체력적 부담이 컸던 극들을 연이어 하고, 최근 부상까지 있는 상황에서 <은위>를 하고 있는 그에게 몸 상태를 물었더니 "스케쥴 없는 날 병원 다녀와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200% '몸 쓰지 말고 누워 있으라'고 하시는데 누워 있으면 백수가 되잖아요"하고 씩 웃으며 대답했던 일이라거나, '인외' 얘기를 하면서 강렬한 이미지에 대해 말하다가 '랭보' 때 인터뷰 했던 정욱진 배우 얘기를 했더니 곧바로 정욱진에게 디렉션을 주는 이지나 연출의 '성대모사'를 선보였던 일 등을 들 수 있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찬호가 보여줄 역설의 이미지

자신의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던 김찬호가 했던 말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인외의 아름다움을 지닌, 너무나 인간적인 휴머니스트가 안겨줄 역설의 미학. 그와의 인터뷰가 즐거웠던 이유를 이 문장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생각해 보세요, 정말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생긴 사람이 인간적인 연기를 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비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저 같은 이미지의 사람이 오히려 인간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연기를 하면 더 세게 비춰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게 저의 브랜드가 될 수 있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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