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6, 필모그라피 인터뷰
‘엠. 버터플라이’ 끝나고 좋은 연극에 많이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좋은 텍스트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극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더운 날이었다. 선선해서 딱 기분 좋았던, 늦봄과 초여름 사이 같던 날씨가 존재하기는 했냐는 듯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고 공기도 후끈하기만 한 그런 날이었다. 최정우는 이 더운 날, 보기만 해도 더운 검은 재킷과 검은 바지에 검은 셔츠 차림으로 한낮의 골목길을 성큼성큼 걸어왔다.
"인터뷰 장소 사진 보니까 이렇게 입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츄리닝 챙겨왔어요, 연습실 가서 갈아입으려고."
무대에서 볼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코 앞에서 보니 생각보다 더 잘생겨서 예전에 배구 담당하고 처음 LIG 경기 갔을 때 김요한을 인터뷰하던 그때의 충격을 다시 느끼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실존해도 되나? 약간 현실감이 없는 얼굴. 하 요한이 정말 잘생겼었는데... 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 잘생긴 것만큼이나 꽤 날카롭고 예민해보이는 얼굴이라 인터뷰를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고민을 좀 하고 있었는데 최정우의 그 한 마디로 인터뷰가 흘러가는 방향성이 그 순간 정해졌다.(물론 그 앞에 한 마디가 더 있었다. '어, 아까 위에서 담배 피우고 계신 거 봤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당신을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했냐면
김광보 연출의 <엠. 버터플라이>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느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복수전공 소논문 주제가 문화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었던 나는 퀴퀴한 아트원 시어터 지하에서 <엠. 버터플라이>를 처음 본 순간 그 텍스트가 갖고 있는 엄청난 에너지와 그 안에서 살아 맥동하는 인물들의 정교한 서사에 전율했다. 같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는데도 소논문을 쓸 때 몇 번이나 봤던 영화판 <M. 버터플라이>가 준 충격과는 그 결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대학로의 <엠. 버터플라이>, 그러니까 엠나비를 그 순간부터 너무나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정말이지 그러다 보니, 2024년 지금, 2017년의 동연나비 이후로 7년 만에 다시 엠나비가 무대에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아멜리 노통의 책 제목처럼(오리지널이야 키에르케고르지만) 극심한 두려움과 떨림을 겪고 있었다. 연강홀 객석에 앉아 어쩌면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엠나비일 것이 분명한 극의 시작을 기다리던 첫공날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5연에 대한 감상은-몇 번이나 이 공간에도 쓰려고 했다가 실패했듯이-아직도 내 안에서 완전히 정제되지 못하고 복잡하게 뒤엉켜있으나 즐거움도 있었다. 이 극을 통해 좋은 배우 한 명을 알게, 아니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 그게 바로 최정우였다.
최정우의 송 릴링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왜 인상적인지를 쓰려면 결국 엠나비의 리뷰를 써야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처음 봤을 때 흐음~ 하는 정도에 그쳤던 감상이 두 번째 무대를 보고 어라? 로 바뀌었고 그런 감정의 변화가 연속되면서 '이 배우가 하는 송 릴링을 끝까지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다(생각해보면 재연 때 꽃다송을 보면서도 대충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데이킨으로 먼저 알고 있던 배우였기에,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맛보려고 잡았던 것이 그렇게 회전이 됐다. 그리고 엠나비가 끝나갈 무렵, 최정우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영부영 공연이 끝나버렸고 나의 인터뷰 의지도 시들해지는 듯 싶었다. 그러다 <빵야>로 인터뷰를 다시 추진하게 되면서 나는 어떤 '극'에 대한 간결한 인터뷰가 아니라 최정우라는 사람을 배우라는 '맥락' 속에 넣어보는 인터뷰를 하고 싶어졌다.
질문으로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라서 미안해요, 그래도 재미있었죠?
그래서 이번 인터뷰를 앞두고, 지금까지와 다르게 질문지에 조금 더 공을 들였다.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이 친구가 한 인터뷰들을 검색해서 다 읽고, 필모그라피와 SNS도 열심히 찾아보며 스터디 아닌 스터디를 하고 질문지를 썼다. 처음에는 엠나비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망이 컸는데 필모그라피를 쫓아 하나의 시간선을 그려내다 보니, 스쳐온 극들과 앞으로 해나갈 극들, 그리고 배우로서 최정우라는 사람이 어떤 마인드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져 질문지의 분량이 계속 늘어났다. 텍스트로 질문을 받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공격성을 최소화하고, 질문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뭔지 좀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끔 질문 자체를 최대한 서술적인 대화체로 뽑은 것도 분량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일 거다.
그러면서 머릿말에는, 기사의 첫 문장이기도 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대사 한 구절을 적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이라기에, 어떤 느낌으로 이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하는지 첫 문장을 보고 짐작해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물론 아무리 공들여 질문지를 만들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이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이런 자기만족에 가까운 행위를 한 번 거치면 상대가 어떤 방향으로 튀어가더라도 인터뷰의 고삐를 조이는데 도움이 되니까, 응.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 보냈는데 최정우의 반응은 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는 질문지를 열심히 읽어왔으며("이런 질문 어떻게 생각하시지, 진짜. 처음에 핸드폰으로 봐서 글자가 너무 작은데 막 질문이 3~4줄이 넘고 날카로운 거예요. 대답을 쉽게 하기 어렵더라고요."), 질문지를 바탕으로 성실히 대답하려고 인터뷰 시간 내내 심혈을 기울였고("제가 원래 말을 이렇게 못하지 않거든요? 예전에는 이런 질문에 정말 바로바로 대답하고 그랬는데."), 요청한 내용을 성실하게 반영해주는("질문지에 첫 인터뷰 읽어보라고 하셔서 다 읽고 왔어요. 기자님한테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고 생각해왔죠!") 보기 드문 인터뷰이였다. 심지어 내가 무대에서 본 그는 정확한 딕션으로 많은 양의 대사를 매우 빠르게 치는 편이었는데, 인터뷰를 진행한 시간 동안에는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고, 표현 하나하나를 정제하기 위해 애를 쓰느라 그랬는지 말투가 매우 느리고 나직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계속해서 "제가 지금 대답을 잘 하고 있나요?", "너무 간단하게 대답하는 거 아니에요, 저? 더 말해야 하는데.", "뭔가 미흡하게 대답한 건 없었나요? 더 생각해볼게요"라며 인터뷰에 120% 충실한 모습을 보여줬고, 나는 인터뷰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다.
쿠션 치는 남자, 최정우
2시간이 조금 넘게 진행된 긴 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말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고른다는 점이었다. 최정우는 (그가 이미 질문지를 정독하고 왔음에도)답변 하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타입이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르고, 자신의 표현이 뭔가 적확하다 생각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싹뚝' 잘라주기를 요청했으며, 무엇보다 꽤나 자주 쿠션을 쳤다. <빵야>에 새로 합류한 배우들을 옆에서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가 대표적이다. 인터뷰에 이골이 난 배우들은 운만 띄워도 캐스트 별로 이런 점, 이런 점이 재미있고 이런 점이 매력적이며 이 사람은 이래서 합이 잘 맞는다, 하는 대답을 편하게 내놓는다. 하지만 최정우는 초연 캐스트로서 네 명의 '빵야'역 배우들을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한참을 끙끙 앓았다. 형들이자 까마득한 선배들을 제가 감히 평가하는 느낌이 들까봐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겨우 설명에 나서면서도 "제가 무슨 연기에 대해 대단히 보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 평론가도 아니지만" 하는 단서가 꼭 첫 머리에 붙었다. 그가 한 다른 대답들에도 이런 식의 쿠션들이 아주 푹신하게 깔려 있어 그 위에서 낮잠 자고 일어나도 될 정도였다.
처음 몇 번은 그냥 말버릇인가보다, 아직 베테랑도 아니고 어느 극에 들어가든 막내 위치에 있으니 아무래도 조심스럽겠지, 정도로 생각하며 흘려듣다가 중반부 이후 정말 궁금해져서 '이야기를 할 때 쿠션을 참 많이 치는 편인 것 같다'고 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말 실수를 할까봐 조심스러우신가 보다'고 덧붙이자 그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말실수보다, 소중한 극을 하고 있고 혼자 하는 것도 아닌데 더 잘 표현하고 싶고, 어떻게 하면 생각하고 있는 걸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보니..."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내 실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참여하고 있는 극, 함께 하는 사람들을 더 잘 이야기하고 싶고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이렇게 쿠션을 남발하는 사람도 드문데. 기사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의 쿠션을 족집게로 하나하나 뽑아 한 곳에 모아놓는 작업을 하면서 문득 그날 내가 그토록 편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가 아주 두툼하게 쿠션을 깔아준 덕분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됐다.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줄 인터뷰'를 위하여
통상적으로 인터뷰는 30분에서 1시간을 넘지 않게 진행하는 게 관례다. 관례라고 하면 좀 우습긴 하지만, 보통 콜 들어가기 2시간 전쯤 인터뷰를 시작해서 사진 촬영을 하고, 그 후에 본격적으로 인터뷰하는 시간을 갖게 되니까 그 정도 시간에서 잘라주는 게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필모그라피를 따라 쭉 이어지는 서사적 구성으로 기획했기 때문에 컨택 단계부터 조금 길게 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고, 이 점을 담당자에게도 슬쩍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똑같이 콜 타임 2시간 전부터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어도 안전하게 시간을 배분하고 인터뷰를 위한 대화 쪽에 중심을 실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녹음 파일의 시간을 확인해보니 대충 2시간 10분을 조금 넘는 시간이 찍혀 있다. 사이사이에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았고, 여기에도 쓸 수 없는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는데,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인터뷰인지 수다인지 오타쿠 토크인지(후반부는 확실히 오타쿠 토크에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는 시네필이었고 나는 시네ㅍ 정도까지는 되는 전직 영화제 활동가에 에디터이기도 했으니까) 모를 이야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뜰채로 그가 흘려보내는 이야기들을 건져올리는 작업에 취해 약 2시간을 즐겁게 '일'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원래도 피쳐 기사나 분석용 박스 기사보다 인터뷰 쓰는 것을 더 좋아하기는 하는데, 한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스터디를 거쳐 직업적 아이덴티티라는 맥락 속에서 그 사람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을 기술하게끔 유도하는 이 작업 방식이 꽤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물론 품은 엄청나게 들지만. 온라인용 피처가 아니라 시간과 분량이 제한된 매거진이나 신문일 경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작업 방식이고). 그리고 이 방식을 인터뷰이인 그도 꽤 마음에 들어해줬다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기억될 것 같다.
엠나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가 그런 말을 했다. 엠나비가 배우로서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도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고.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몇 개 더 이어하다가, 질문지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오늘 이 인터뷰도 제가 한 인터뷰의 어떤 전환점이 될 것 같다"고. 그때는 그저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하고 말았지만, 오늘 이 글을 정리하면서 생각하니 이번에 한 최정우의 인터뷰는 내게도 여러모로 전환점이 될 만한 인터뷰였던 것 같다. 이 인터뷰를 기점으로 인터뷰이를 보다 많이 공부하고, 깊이 이해해서, 아주 긴 호흡으로 써내려가는 한 편의 포트폴리오 같은 인터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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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보드] 최정우, "'엠. 버터플라이', 제 인생의 전환점 될 작품"①
[캐스팅보드] 업그레이드된 ‘빵야’와 함께 행복하기… 최정우는 지금 공연을 사랑하는 중입니다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