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컴프롬어웨이>
* 스포일러 없습니다.
* 서울자치신문 공연 섹션에 기고한 리뷰(원문 링크)입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5분(한국시각 오후 9시 45분). 비행기 한 대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충돌했다. 후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은 물론 시리아 내전 등 중동전쟁 20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시발점이 된 사건, 9·11 테러의 시작이었다.
수많은 사건사고가 범람하던 시대였지만, 그날 밤 TV를 통해 본 장면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두 대의 비행기가 제1세계무역센터와 제2세계무역센터에 연달아 충돌하고, 또 다른 비행기가 미 국방부 청사(펜타곤)에 충돌하는 장면은 미국에서 약 14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9·11 테러의 그날로부터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엄청난 사건도 어느덧 역사가 되어 우리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가던 무렵, 캐나다 온타리오의 셰리든 컬리지 발(發) 뮤지컬 한 편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경유해 한국에 착륙했다. 9·11 테러 당시 미 영공 폐쇄로 인해 하늘에 발이 묶인 400여 대의 비행기를 받아들인 캐나다, 그 중에서도 뉴펀들랜드섬의 작은 마을 갠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컴프롬어웨이’(기획·제작 ㈜쇼노트)다.
‘컴프롬어웨이’는 9·11 테러의 그날,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땅에 불시착한 ‘비행기 사람’들과, 갑자기 그들을 맞이하게 된 갠더 사람들의 이야기를 1·2막 통틀어 130분(인터미션 20분 포함)의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대에 서는 배우들은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대사와 넘버들 사이로 ‘비행기 사람’들과 ‘갠더 사람’들을 번갈아 연기하며 100명 가까운 인물들을 관객의 눈앞에 그려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남경주·최정원·신영숙·고창석·정영주·차지연 등 베테랑 배우들부터 나하나·현석준·김찬종·홍서영 등 젊은 피 배우들까지 총 24명의 배우가 누구 하나 빠짐 없이 1인 다역을 소화하는 중이다. 방금 전까지 불안에 떠는 ‘비행기 사람’이었다가, 고개 한 번 돌렸다 무대를 바라보면 그들을 걱정하는 ‘갠더 사람’이 되는 순간적인 연기 변화에 나도 모르게 변검을 떠올릴 정도로, 무대 위 순간순간이 모두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배우들의 열연 못지않게 놀라웠던 건, 이 극이 9·11 테러를 극중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슬프거나 비극적인 정서를 전면에 내세워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컴프롬어웨이’는 9·11 테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극이 아니다. 사견이지만, 오히려 ‘컴프롬어웨이’는 9·11 테러라는 거대한 사건이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미시적으로 조명한 극에 가까워 보인다. 9·11 테러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피해자와 그 슬픔의 정도를 비교할 수야 없겠으나, 이토록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고도 이전과 같은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갠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그 비행기 안에 테러범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비행기 사람’들을 따스하게 맞아들인 갠더 사람들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위 중 하나인 테러가 남긴 상처와 파편을 수습한다. 극의 후반부가 되면 관객석에서 거리감을 두고 극을 바라보던 우리마저도, 어제와 오늘의 삶에서 다친 상처들을 무의식적으로 발 아래 내려놓고 갠더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치게 된다.
그래서 ‘컴프롬어웨이’는 어쩌면 거대한 심리치료의 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가 아직 온존하고 있는 인간 본성의 선량함을 믿게 하는 힘, 연대에 대한 희망이 곳곳에 묻어난다. 첫 넘버부터 시작해 극 전반을 휘감는 켈트 음악 특유의 목가적이고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뉴펀들랜드는 영국·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의 후손이 많은 켈트 문화권이다) “잃은 것을 애도하고 새롭게 찾아낸 것에 감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길 바란다. 우리는 여전히 연대와 위로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뮤지컬 ‘컴프롬어웨이’는 내년 2월 18일까지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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