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너머에서 당신의 고양이가 울고 있어요
대체 언제부터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순간도 '심심해'졌는지 모르겠다.
오직 욕구를 발산하기 위해 찾는 몇 안되는 공간인 화장실은 내 삶에서 무척이나 중요하고 신성한 장소였다. 큰 걸 보든 작은 걸 보든 배설의 행위가 주는 독보적인 카타르시스, 그리고 묘한 배덕감을 즐길 수 있는 그 곳은 어릴 적부터 항상 내게 어떤 종류의 쾌감을 안겨줬다. 그러나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해치우고 마는 전형적인 한국인 습성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큰 걸 보는 시간 동안의 지루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신문을 가지고 들어간다던가 하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간혹, 어제 빌린 만화책을 오늘 반납해야하는데 미처 다 읽지 못했다는 이유로 화장실에 대여점 만화책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없다. 대신 꼭 손에 핸드폰을 쥐고 들어간다. 혼자 살던 여자가 여행가기 전 화장실에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그 안에 갇혀 죽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집 화장실 문 손잡이가 고장나서 열 번에 한 번은 제 멋대로 잠겨버리게 된 뒤로는 세수를 하러 들어갈 때도 꼭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역시 심심해졌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도 뭔가를 보고 읽고 눈으로 쫓아야하고 대화를 나눠야하는 삶이 되어버린 건 스마트폰이라는 엄청난 녀석이 나타났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에 중독된 채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 책이나 신문은 안 가져가더라도 짧은 시간 기사 한 꼭지나 짤방 하나 정도는 볼 수 있는, 그리고 적어도 1이 사라지자마자 반응해야하는 강박 속에서 'ㅇㅇ'이라는 성의 없는 대답이라도 돌려보내야하는 카톡 때문에라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문득 조르바가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모든 인간은 사슬에 묶여 있으며 자유는 결국 그 사슬의 길이에 달려있을 뿐이라는. 내 사슬 끝은 스마트폰이 쥐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요새는 화장실에서도 딱히 심심하지 않다. 빼꼼히 열어둔 문틈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대체 저 인간이 이 미지의 영역에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때문이다.
녀석의 이름은 시루다.
녀석을 데려오기 전, 동생과 내가 각각 후보로 밀었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떼어 만든 이름인데 막상 데려오고 나니 꼭 시루떡 같이 생긴 모양새가 영락없이 잘 어울려서 "음, 작명에 소질이 있나봐"라며 둘이 서로 코를 쓱 문지르며 바보같이 웃었다. 물론 우리는 시루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아니면 딱히 좋아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다. 시루가 우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알 수 없다. 애초에 시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녀석과 우리의 언어체계가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녀석과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평소에는 꼭꼭 닫혀있는 문 너머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어쩔 줄 모르고 화장실 앞을 왔다갔다 하는 녀석은 아주 조금, 문을 살짝 열어주면 동공지진을 일으킬 정도로 무서워하면서도 굳이 열린 문틈으로 머리를 밀어넣고 변기 위에 앉아있는 나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고 교정기를 낀 무시무시한 얼굴로 내가 웃어주면 시루는 입을 꽉 다물고 눈만 크게 뜨다가 이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버린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다시 주춤주춤 걸어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내게 묻는 듯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야, 너 거기서 대체 뭐하니? 괜찮은 거니? 위험하지 않니?"라는 듯이.
지금 녀석은 현관 근처, 아직 정리하지 않고 그냥 내팽겨쳐 둔 캐리어 위에 발랑 드러누워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녀석은 이번 달로 생후 9개월이 되고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8개월이 됐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 집에서만 살아도 괜찮다고는 하지만, 반지하라는 특성 때문에 우리는 늘 시루에게 조금 더 맑은 공기와 햇볕을 쐬게 해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야심차게 목줄을 사서 채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허물 벗듯 목줄을 벗겨내고 우아하게 어슬렁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y영역에 대한 자신의 뛰어남을 과시하듯 도움닫기도 없이 장롱 위에 올라가 먼지덩어리를 코에 묻히고 하품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목줄을 집어 던지고 맑은 공기나 햇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며 스스로를 타박한 뒤 집 청소에 돌입한다. 그래, 산책은 됐으니 시루가 코에 먼지를 묻히지 않을 수 있도록 집이나 치우자. 고양이를 데리고 산다는 것은 청소와 친숙해져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부산스럽게 청소를 하고 나면 녀석은 폴짝 뛰어내려 침대 위로 올라와 우리 배 위에 드러누워서는 골골대며 식빵을 굽는다. 마치 "잘했다, 인간"이라며 칭찬해주듯이.
그러니까, 고양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늘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심심한 것도 심심하지 않은 듯, 심심하지 않은 것도 심심한 듯.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고양이의 성격이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야 있겠지만 시루와 나, 그리고 내 동생의 생활은 언제나 싱겁기 그지 없으면서도 물에 섞은 요리수처럼 적당히 맛있게 짭쪼름하다.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소리 높여 울어대는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문을 조금 열어놓고 일을 보는 습관이 배어들듯, 그런 식으로 고양이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든다.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얘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