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망친다, 여름을 피해 네버랜드로

이태원만물상, 혼술을 위한 핑계

by 밋너

정말 더워도 지독하게 더운 날이다. 아니, 날들의 연속이다. 이대로 살다가는 죽지 않을까?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덧없는 소리를 중얼거려본다. 일주일 동안 꼬박 이어진 밤샘근무 당번을 마친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위 때문에 오래 잠들지 못하고 5시간 동안 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에어컨이 없는 이 집에서 있다간 죽어. 나 정말 죽는다. 그래서 뜬금없이 마사지를 예약한 뒤 혼술을 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습식사우나 같은 집을 혼자 지켜야 할 시루에게는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그리고 지금 나는 우사단길에 앉아있다. 전면유리창 너머로는 24시 보광수퍼의 간판이 희미하게 비치고 몸을 뻗어 앞으로 내밀어 오른쪽을 바라보면 불빛이 까무룩대는 우사단길의 이태원만물상에서, 휘슬러 그레이프프룻 에일 한 잔을 마시며 더위에서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술을 시키면 안주가 나오는 이 좋은 혼술집은, 나처럼 술을 마실 때 대단한 안주가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주전부리는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넉넉한 인심을 발휘한다. 쪄내온 알감자 세 알(그나마 한 알은 내가 먹어치우고 있다)이 보이는가. 교정기를 낀 이후로 찐 감자를 먹은 건 처음이다. 들어갈 때 친근하게 인사해주고 종종 내가 심심해보이면 말을 걸어주는 주인 언니의 다정함을 제외하면, 나처럼 술을 마실 때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독히 행복한 술집이다. 혼술에 최고라고나 할까.


사실은 그렇다.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할까. 이 지독한 더위를 이겨내려면 결국은 도망치는 방법 뿐이다.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도망치고, 열기가 푹푹 쪄오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도망치고, 잠들 수 없는 열대야를 선사하는 악마같은 밤에서 도망친다. 이렇게 더운데도 에어컨 하나 제대로 켤 수 없게 만드는 세상에서 도망치고, 곧 날아올 전기세 고지서를 눈 딱 감고 외면하며 도망치는 거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선택지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없는지도 모른다.


난 그래서 여기에 온 게 아닐까? 도망치고 싶어서.

더위에서 도망치면서 삶의 패배자가 되는 기분을 느낀다는 건 좀 우울한 일이다. 하지만 만물상은 나를 그런 기분으로부터 구원해준다. 자가당착의 히어로지만 피터팬은 그 철없음으로 우리를 열폭에 빠뜨리는 존재가 아니던가. 만물상의 문을 열 때, 그 통유리벽에 적힌 문구가 나를 위안한다. 당신은 얼마든지 도망쳐도 된다고, 피터팬이 되어도 된다고.



우사단의 낮술집 아오이소라를 운영하던 주인언니는 지금 안동에 양조장과 술 빚기 체험장을 겸하는 건물을 짓고 있다고 했다. 이 얼마나 반가운 얘기인가. 잠깐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와 푹푹 찌는 열대야와 맞닥뜨리자니 역시 도망치는 것이 최고라는 결론만 나온다. 삶은 다 이런 식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던가?


글렌피딕 한 잔을 온더락으로 마시고 안주로 리필된 포도 한 알을 입에 넣고 씹는다. 술이 디오니소스의 선물이든, 아니면 그 어떤 악마의 선물이든 그건 정말 지옥불에 타면서라도 즐겨 마땅할 지복이다. 대화는 선택적으로, 술은 주인공으로. 입 안에서 향을 풍기는 술을 머금은 채 오락실 갤러그를 하며 옛날식 선풍기에 몸을 맡기는 이 여름의 도피가 행복한 이유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더위를 달래줬을 선풍기는 아직도 짱짱한 바람을 내보낸다. 역시, 노장은 죽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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