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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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경제학자 사르토리(Giovanni Sartori)는 추상의 사다리(Ladder of Abstraction)를 제시합니다. 어떤 개념이나 사고에는 층위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층위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예시가 바로 동물 분류체계입니다. 한 마리의 강아지를 생각해 볼까요. 강아지를 한 단계 올려서 생각해 보면 개과가 있습니다. 개과는 개, 늑대, 여우 등의 동물들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더 층위를 올리면 포유류의 일종입니다. 더욱 올리면 동물의 하나이지요. 더 올리면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일종의 생물로 표현 가능합니다. 더 올리면 무생물과 생물을 포함한 '어떤 존재'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고의 층위'라는 개념입니다. 연필의 상위 차원은 필기구, 더 올라가면 도구가 있겠고, 연필의 하위 차원에는 4B연필, 2B연필 등이 있겠습니다. 위의 그림에는 아래로 갈수록 구체적이고, 위로 갈수록 추상적임을 나타내는 사다리가 있습니다. 추상화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설명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지지만 정확도는 떨어지고, 구체적이 될수록 설명 가능한 범위는 좁아지지만 정확도는 높아집니다.
강아지의 행동패턴을 연구하는 A연구가 있고, 모든 동물들의 공통적인 행동패턴을 연구하는 B연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A연구보다 B연구가 추상화의 정도가 높습니다. 따라서 A연구보다 B연구가 더 넓은 범위의,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의미함은 낮아질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의 공통적인 행동패턴을 제시하려면 상당히 뻔한 부분만 남게 될 것이니까요. 반대로 강아지의 행동패턴에 대한 연구는, 오직 강아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적용 가능한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습니다. 그렇지만 상당히 정확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제시할 수 있겠지요.
모든 개념들과 모든 주장에는 층위(차원)이 존재합니다. 다음 주장을 한번 평가해 봅시다. 혹은 논리적인 반박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해 보셔도 좋습니다. 방금 떠올려본 예시입니다.
굳이 학교에 가서 뭘 배울 필요가 없어. 자기 집에서든 어디서든, 그냥 편한 곳에서 배우면 돼.
만약 위 주장에 대해, "어떤 일을 하는데에 있어서 장소의 중요성을 너무 뭉개신 것 아니냐" 하고 반박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혹은 "어떤 행위에 있어서 구체적인 장소가 주는 효과나 의미가 분명히 있습니다" 라고 반박해볼 수 있겠죠. 방금의 대답은 상대방 주장의 차원을 교묘히 높인 반박입니다. 상대방은 '학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반박은 '장소는 중요해!'라고 이루어졌습니다. 학교보다 장소가 차원이 높은 개념입니다.
"아냐, 학교는 중요해!" 보다, "아냐, 장소는 중요해!" 라는 반박이 훨씬 깨기 어렵습니다. 층위가 높아질수록 논리적 다툼보다 가치관의 차이 문제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의 기본소득제가 바람직한지 아닌지에 대한 설전은 다양한 통계와 논리 싸움이 될 수 있지만, 복지의 확대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가치관/이념 싸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원래 예시로 돌아와서, "학교에 굳이 가야 돼?" 라는 주장에 대해 "아냐, 그래도 장소가 주는 의미가 분명히 있지" 라고 반박했을 때, 상대방이 별 생각 없이 "장소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라고 받아치면 토론은 이미 끝입니다. 장소라는 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까요.
상대방이 만약 "나는 지금 일반적인 장소의 중요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어" 라고 말하면서, 내가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논의를 이끌기 위해서 교묘히 올려두었던 층위를 원래대로 다시 내려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적합한 예시를 들다 보니 토론 상황을 가정하게 되었는데, 사고의 층위라는 개념은 다양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 분명 핵심적으로 작동합니다. 샐러드 가게를 창업하려는 사람은, 층위를 높여서 요식업 분야에서 창업할 때 필요한 것들, 더욱 높여서 어떤 업종이든 창업할 때 필요한 것들, 더욱 층위를 높인다면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때 명심해야 할 것들' 까지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 연인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 모두 층위를 높여 생각하면 그냥 인간관계입니다. 연인관계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사고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 내가 인간관계를 맺을 때 저지르는 실수들 자체에 대해 성찰해 봄으로써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아서 고민인 분은, 공무원이 된다는 것으로부터 동기부여를 얻고자 시도할 수도 있지만, 차원을 높여서 '직업을 얻는다는 것', 더욱 높이면 '자아실현에 가까워지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영어 독해(영어로 된 글을 읽기)가 어려우면, 영어 독해가 아니라 독해 자체의 문제(글 자체를 잘 읽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에서 전달드린 사고/개념의 층위 개념은 어떤 주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더 나아가서 다양한 문제해결 상황을 분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게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