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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8. 2020

Perhaps, perhaps, perhaps

왕가위 <화양연화>

좋아하는 영화나 책을 생각날 때마다 계속해서 다시 보는 편이다. 이번 주에는 화양연화를 아마 다섯 번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았다.


한 세 번째 보았을 때까지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싱가폴에 간 차우가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건네 받은 뒤 두 번째로 ‘여보세요’라고 말하고, 뒤이어 Nat King Cole의 <Quizas, Quizas, Quizas>가 흐르던 장면이었다. 첫 번째로 ‘여보세요’라고 말한 뒤 이어진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차우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의, 약간은 긴장한 것 같고 약간은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의 두 번째 ‘여보세요’는 굉장히 로맨틱하면서도 애절하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quizas, 영어로는 perhaps란 뜻의 노래까지, 이 시퀀스는 각자 다른 길을 택한 연인들의 마음을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묘사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 번째 정도 보기 시작할 때부터는 좋아하는 장면이 조금씩 바뀌었다. 네 번째 보았을 때는 두 사람이 호텔 2046호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을 좋아했다가, 다섯 번째 본 뒤에는 두 사람이 골드핀치 레스토랑에서 ‘그들은 어떻게 시작했을까’를 상상하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장면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옥색 찻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차우와 수리진이 마주 보고 앉아 각자의 상처입은 속내를 조심스럽게 내비치기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차우의 옆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Nat King Cole의 <Te Quiero Dijiste>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좋아하는 영화와 책을 계속해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내용과 같은 장면들인데 그것을 보는 나의 시선이 바뀐다. 무엇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지 그 때 그 때 다시 느끼며, 나는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체중이나 키를 재 보는 것과 같다.


나는 다섯 번째로 화양연화를 보면서 내가 그 동안 모든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 꽤 잘 알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지나온 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알 것 같았다. 때론 말리고 싶을 정도로 무모했고, 때론 깜짝 놀랄 정도로 이기적이고 차가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쳐 적고 싶은 선택지는 하나도 없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나를 거쳐 갔지만 나는 항상 나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때의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나는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좋은 것만을 골라 남겨놓는다. 나는 ‘달리 되었더라면’ 같은 종류의 상상력이 없다. 그것이 최선의 좋음이었다고 기억하는 것만이 스스로 후회를 남기지 않을 방법이다. 어제가 된 오늘에서 나는 항상 그랬기 때문에, 오늘이 될 내일에도 그럴 것이다.



수리진과 차우가 시간을 되돌려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들이 똑같이 커피를 마시고, 2046호에서 소설을 쓰고, 떠나고,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게 보냈고 그렇기에 그리움은 남을지언정 후회는 없을 것이다. 앙코르와트에 간 차우가 흙으로 메운 구멍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앞날을 두려워하면서, 또 똑같이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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