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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8. 2020

친애하는 브루투스, 잘못은 저 별에 있는 것이 아니네

저스틴 커젤 <맥베스>

Why, man, he doth bestride the narrow world
Like a Colossus; and we petty men
Walk under his huge legs, and peep about
To find ourselves dishonourable graves.
Men at some time are masters of their fates:
The fault, dear Brutus, is not in our stars,
But in ourselves, that we are underlings.
— <Julius Caesar>, Shakespeare



주말에 영화 <맥베스>를 본 뒤 갑자기 셰익스피어에 빠져서 원작을 차례대로 복습하기 시작했다.(이 글의 초안은 2015년 12월에 작성 됐다.) 읽은 책을 또 읽을 때의 가장 큰 즐거움은 예전에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 <햄릿> 이 네 이야기의 공통점은 작품의 제목이 모두 주인공들의 이름이며, 악역이 있지만(<맥베스>는 주인공이 악역이 되어가는 과정이긴 하다) 비극을 초래하는 것은 주인공들이란 점이다.


악역들에게는 오히려 나름의 당위성이 있다. 햄릿의 숙부는 적자 중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왕위 계승에서 소외되어, 형에 대한 열등감과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굶주려 왔을 것이다. 리어의 두 딸 고너릴과 리간은 간통한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저주를 들으며 자랐다. 코딜리어도 같은 친모에게서 난 딸임에도 리어는 드러내놓고 그녀만 편애했는데, 아마 고너릴과 리간은 친모와 더 닮았고 그 쪽과 더 가까이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오셀로의 부하 이아고는 천하게 여겨지던(중세식으로 표현하자면 ‘사악함’에 가까웠을) 무어인에게 자신이 부당하게 무시당했다는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주인공들이 나약한 인간인 것은 갈등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맥베스는 황야의 마녀들에게, 리어는 두 딸에게, 오셀로는 이아고에게 속는다. 사실 속는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앞뒤 상황도 이해득실도 따지지 않고 그냥 그 말을 믿어버리는데, 이 나약함이 드러나는 모습에 대한 묘사가 아주 현실적이다. (햄릿은 이 부분에서는 살짝 궤도가 다른데 그는 아버지의 유령을 만난 뒤 스스로 내면에서 선택지를 만든다.) 이전까지 선하고 덕망있던 삶의 질서를 유지하던 주인공들은 질투, 욕망, 왜곡된 자기연민과 애정결핍 등에 어느 순간 지나치게 자신을 내어주면서 자기들의 운명을 비극으로 탈바꿈 시킨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모두 불행의 불씨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셀로에서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이니라 원래 질투심이 있어서 질투하는 거에요. 질투는 저절로 잉태되고 저절로 태어나는 괴물이거든요.”


주인공과 악역 모두에게 각자의 ‘운명’이 있다. 하지만 그 운명이 필연으로 부과된 것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하고, 결국 각자가 자신의 운명이라 믿는 것들을 어떻게 엮어나가는지의 과정이 주된 이야기를 이룬다. 영화 <맥베스>는 도입부와 결말 부분에서 각색한 씬들을 삽입하여 이 주제 의식을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아기의 장례를 치르는 맥베스 부부의 모습은, 가장 사랑하는 것의 상실이라는 고통을 안겨준 운명의 처사에 대한 그들의 반기가 눈 먼 야욕으로 변모할 것이라 예고한다. 맬컴 왕자와 뱅쿠오의 아들 플리언스가 각자 자욱한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엔딩 시퀀스는, 그들에게도 각자 지워진 예언이 있을 것이며 그것 또한 그들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엮어질 것이라고 한번 더 주제를 공고히 한다. 그 예언이 맥베스처럼 황야에서 들은 것이든 햄릿처럼 스스로 내린 결론이든 말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와 4대 비극들에서 꾸준히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 읽었다. 인생의 모든 모멘텀들은, 운명이라고 믿는 것의 얇은 표피 밑에 숨어있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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