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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8. 2020

가만한 이야기

<패왕별희>,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만화든 책이든 무엇이든, 내 기억 속에서 내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이일 때부터 나에겐 항상 그 시절의 단짝친구 같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내가 지나 온 나이를 생각해 보면 항상 그 때의 나를 지배한 이야기 속 한 장면들이 함께 떠오른다. 이야기는 나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아주 길고 넓은 하나의 통로다. 어릴 때부터 나는 픽션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 배우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 왔다. 실제 세계의 사람들이 그릇된 자기애와 비대한 자의식 속에서 쓸데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로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픽션 속 인간들은 군더더기 없이 흥미진진한 얼개와 각종 감각적 장치를 발판 삼아 인간 단면의 핵심만을 쏙쏙 집어 보여 주었다. 그리고 같은 인간이라도 현실이 아닌 가상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인간은 덜 역겹고 더 아름답게 보여졌다. <고스포드 파크> 속 등장인물들은 한번 손가락질 하며 혀를 차고 나면 잊어버릴 수 있지만 현실 세계 속 재벌 가족들의 기행은 알면 알수록 스트레스만 받게 되는 것처럼, 조빔과 봉파의 음악에 귀를 열고 <흑인 오르페(ORFEU NEGRO)>를 보면 정열적이고 비극적인 남국의 연인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지만 실제 세계에서 주변에 그런 커플이 있다면 그냥 감정을 주체 못해 그 난리를 치는 젊은이들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처럼 말이다.


<패왕별희>는 이미 너무 유명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영화를 17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 극장이 아니었다면 또 한번에 완전히 못 봤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실내에 불이 켜지자 앞 줄에 앉아있던 남녀가 일어나서 서로를 마주보고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가 심오하네.”            




픽션은 꼭 해석되어져야 할까? 당연히 어떤 상징이나 복선을 의도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어떤 해석이나 해설을 찾아보는 것도 물론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방식일 수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 하는 것도 당연히 틀린 방법은 아니다. 어떤 것에서 감명을 받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감명의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때때로 각자의 언어로 해석되어진 이야기들이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와 울림을 주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아득한 기분이 든다. 무너진 바벨탑 밑의 인간들처럼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밖에 대화할 수 없다는 점이 막막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 여전한 의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꼭 해체해서 살을 발라내, 교훈을 배워야 할까? 어쩌면 아직도 독후감 숙제의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든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을 접하고 동시에 그 이야기들을 접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해 본 결과, 사람들이 ‘어렵다' 혹은 ‘심오하다'고 표현하는 부분은 실제로 그 이야기가 복잡하고 고차원적일 때 보다도, 자신이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의 묘사를 맞닥뜨릴 때가 훨씬 많았다.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아직 겪어본 적 없거나 그런 감정의 회로 자체를 타고 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는 이렇게 두 가지일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는 성별과 국적과 시대가 달라도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이 담겨 있다. 영화나 소설의 결말이 도덕적, 건설적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해도 그 핵심의 단초를 영상이나 글자로 풀어서 보여주는 것 자체로 존재의 의의를 가진다. 역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느끼고 내면의 감정에 움직임이나 울림을 느꼈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르거나 명작 반열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좋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가치란 개념 자체가 고정적이지 않은데 ‘좋은 이야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하고 생각해 봐야 할 만한 이야기란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내가 굳게 믿는 몇 안되는 명제 중 한 가지다.            




나는 20기 초에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영화 <패왕별희> 시대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극단에서 탈주한 두지와 샤오라이즈가 경극을 보며 엉엉 운 그 마음에는 공감할 수 있다. 데이와 샤오루, 쥬샨 세 명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너무나 거센 시대 속에서 스스로를 지켰음을 이해할 수 있다. 경극 배우로서의 자신, 누군가를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자신, 혹은 그들처럼 자신을 간결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자신.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이 자신을 받아 들여 주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겐 각자 ‘자기 자신 됨'을 행해 나가야만 하는 굴레가 있다. 아마 이 굴레는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누구도 쉽게 벗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배우도 아니고 평탄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조차도 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청데이가 그 순간에 왜 그렇게 행동했고, 샤오루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쥬샨이 ‘주체적인지 아닌지' 등을 논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나에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가치 판단을 하고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더라도 하나의 훌륭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시대적 가치에 맞지 않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시대가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 그게 사실 <패왕별희>가 하는 이야기기도 하고. “그는 경극에 미쳐서 관객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노래 했소!” 그리고 “언제까지 영웅과 미녀의 이야기나 노래할 겁니까?”.


아무튼, 나는 사람들이 좀 더 픽션에 관대해지고 자신에게는 좀 더 엄격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걸 거꾸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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