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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우리에겐 빵과 장미가 필요하다

그레타 거윅 <작은 아씨들>




사람은 모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미디어가 정형화 된 여자들의 모습을 강요하고 ‘진실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남성의존적 이성애자 여성의 인생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려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내가 듣고 읽고 사랑해 온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이야기 그 자체가 그런 주제를 들려줬다기 보다,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 받았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소녀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현명하고, 진취적인지 보다도 얼마나 착하고, 헌신적이고, 이타적인지, 그로 인한 댓가로 얼마나 좋은 남자와 맺어지는 지에 집중해 픽션을 독해 하도록 배워 왔다. 그런 식의 독해법에 희생 된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 중 하나는 루이자 메리 올콧의 <작은 아씨들>일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 이 책을 읽었을 때 배운 가치는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선한 가족”이었다. 때로는 서로 싸우고 의견이 불일치 하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선행을 지속하면 보상으로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해 또 다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여자의 인생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2020년 영화 속 조 마치는 반복해서 굳건히 말한다. “결혼은 경제적 교환이다”라고. 그녀는 가족의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 글을 써서 판다. 메그는 여전히 사랑을 선택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심정을 솔직히 토로한다. 야망과 원대한 꿈에 부풀어 있던 에이미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여전히 당찬 자신의 방식대로 헤쳐 나간다. 이것은 돈을 벌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남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는 절대로, 여자들이 사랑과 현실 중 양자택일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착하고 성실한 여자에겐 사랑과 성공이 모두 따라 온다고 이야기 하지도 않는다. 모두에겐 선택권이 있다. 고독함과 경제적 현실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 순간의 충동이 남은 우리의 일생을 좌우할 필요는 없다고 친절히 설명한다.


이 영화는 <작은 아씨들>의 복각이라기 보다, 저자인 올콧의 삶과 <작은 아씨들>의 내용을 새롭게 조합한 새 이야기에 가깝다. 올콧은 실제로 마치 가 가족들처럼 가난하게 살았고 그녀는 조처럼 글을 써서 돈을 벌어 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했지만 그녀의 가족은 마치 가처럼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이 갖고 싶은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며 쓴 이야기를 들고 출판사에 찾아가, 자신의 글이 팔리도록 하기 위해 여주인공의 결혼 이야기를 두고 협상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속 조 마치의 모습 위에 오버랩 된다. 그 어떤 성격과 어떤 취향을 가진 여자도, 돈 없이 살 수는 없다.





한국여성들은 가난하다. 가난은 상대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이건 객관적 지표가 말해주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의 젠더페이 갭은 40%를 웃도는 세계 상위권이다. 한국 여성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잘 체감하지 못한다. 왜냐면 이런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모두가 열심히 여자들의 주의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신들보다 얼마나 잘 버는지 자세하게 모른다. 혹은, 남자들이 여자들 보다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것이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자연스럽고 인간 본능적인 성별 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경제 구조가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량에 따라 더 근육이 잘 생기고 더 관절이 튼튼한 인간들이 돌을 갈아 만든 창으로 맹수와 싸워서 얻은 가죽이 부의 상징이고 그를 통해 계급을 구분 짓는 식이라면 말이 된다. 하지만 인간들이 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잉여 자산을 축척할 수 있게 되고 전쟁이 ‘맞다이다이’가 아닌 조직적 전략 싸움이 된 후로도, 실제 경제 구조와 전혀 상관없이 이 신화는 몇 천년을 이어져 내려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추상적 혁명을 부르짖는 시대의 구조까지 지배 중이다.


생각보다 적은 돈이지만 원고료를 받고 기뻐 달려가는 조


온라인에서 특정인들이 그렇게 여성서사와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소비재를 소비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현상을 바꾸기 어려운 더 근본적인 이유는 관심도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들은 소비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성별 임금 격차가 여자들을 상대적 가난 속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자 감독이 만든 영화를 극장에서 봐주자고 하거나 여자가 만든 소비재를 밀어주자고 소리높여 외쳐봐야, 돈다발을 쥔 여자들이 다가오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단순히 여성서사에 대한 관심도와 가시성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이 부자가 돼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페미니즘 콘텐츠가 성공한다. 빵을 살 돈이 없는 사람이 매일 꽃병에 장미를 꽂을 순 없다.


난 RPG 게임에 그렇게 큰 돈을 쓰는 ‘아저씨’들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놀랐다. 게임에 너무 몰입해서 무리하게 큰 돈을 쓰는 사람이 엄청 많은 줄 알았다. 아니, 사실은, 사회 생활의 연차 수가 쌓이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게 알게 된 것은, 한국엔 돈이 많은 아저씨들이 많은 것이었고 나는 그 정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놀랐던 것 뿐이었다. 게임에 그 정도 허투루 돈 써서 패가망신할 일 없는 정도의 수입이나 자기 재산들이 있는 사람들이 온라인 게임 상에만 그 정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줌마’들은 돈이 없다. 자기 재산이 없거나 벌어도 생활비도 빠듯한 수준이거나 남편의 재산을 공동 소유 하는 형태다. 똑같이 직업이 있는 남녀 사이에도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한국의 젠더 페이 갭은 2019년 기준으로 40% 가량이다. 젠더 페이 갭이 아시아보다 훨씬 적은 북미와 유럽에서는 중년 여성들도 일정량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게임의 주요 타겟층인데 이 동네에서는 ‘여자는 게임을 안 한다’ 혹은 ‘여자는 게임에 돈을 안 쓴다’가 모든 기획의 불문율이다. 젠더 페이 갭은 잠재적 마켓의 수익성까지 갉아 먹고 있다.


한 마디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닌 집단의 생존 문제이자 전체적 경제 성장의 문제다. 이런 실리적 문제가 거의 의도적일 정도로 너무나 긴 시간 외면 당하는 이유는, 몇 백 가지를 대더라도 전부 비합리적이다. 호주제도 폐지된 이 시대에 남자가 가장이고, 남자가 야근을 더 많이 하고, 남자는 육아 휴직도 쓰지 않고 상사와 술도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조뺑이’를 친다, 는 이야기들은 객관적 사실보다도 그런 방식으로 조직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일부 남자들의 희망사항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의 스키마에는 그런 조직 운영 방식이 효율에 아무런 긍정정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끊임 없이 나오도록 스폰서링 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적다. 전체 파이의 크기가 작은 것이다. 그래서 조가 쓴 네 자매의 이야기처럼 여성 콘텐츠 창작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때로는 창작자들이 현실 순응적이기 보다 미래에 대한 제안을 그리는 내용을 만들고 싶어도, 그런 콘텐츠는 제작자들이 성공이라고 가늠할 수준만큼 잘 팔려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조 마치가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베어 교수와 결혼하는 결말을 뒤늦게 수정해 삽입해야 했던 것처럼, 제작자와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 대중적 기호를 맞추어 수정된 콘텐츠가 더 많고 주목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돈 때문에 사랑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사랑


여성의 경제적 성취를 중요시 여기는 많은 여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메그를 바보 취급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본다. 하지만 메그는 가장 현실적 선택을 한 캐릭터다. 가난한 삶이 너무 지겹고 힘들어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까지 이야기 했던 그녀가 정말로 눈이 멀어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다면 힘들지 않을 것이라 상상하고 존 브룩과 결혼 했을까? 존에게도 메그는 솔직히 말한다. 가난한 삶이 힘겹다고.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상대에 대한 원망을 사과할 줄도 안다. 단순히 착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책임감을 느낄 줄 아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시대상을 고려해 생각해 보자면 메그의 결혼은 바보 같은 선택이 아니라 마치 가의 경제적 계급에 걸맞는 오히려 무난하고 평범한 선택이다. 계급 상향 결혼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모하리만치 급진적 진로를 택한 사람은 에이미다. 그녀는 여성에게 직업을 가지는 선택지가 흔치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화가로 성공하고자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음을 깨닫자 결혼으로라도 신분 이동을 하고 싶어 했다. 물론 로리를 사랑하긴 했지만 아마 로리가 가난한 남자였다면 에이미는 로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이미는 실제하는 여자들처럼 입체적이고 생생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진 캐릭터다. 그런 에이미가 단순히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보수적인가?



사랑은 경제적 성공과 마찬가지로 삶의 질을 영위하는 방식에 대한 사람의 선택지다. <작은 아씨들>이 하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 길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돈이 생존의 문제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자아 충족감은 실질적인 인간 정신의 문제다. 아무리 그것이 단순한 뇌세포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이뤄지는 일이라 해도 실제로 인간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관계, 사랑, 돈, 인생의 모든 문제는 서로 독립돼 있지 않다. 때로는 맞물려 있고 때로는 서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은 높은 지적 능력을 통해 실존적 생존의 문제와 추상적 관념을 조합할 수 있는 인간들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모습들로 구현 된다.




빵과 장미를 함께 달라


인간의 욕망은 다면적이고 그 욕망들끼리 서로 이율배반적일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성들에 한해서는 용납되지 않아왔던 이야기기도 하다. 결혼을 해야한다, 아니 하지 말아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다들 한 가지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우리에겐 이제 겨우 홀로서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을 뿐인데도 벌써 단 한가지 결론에 집착한다.


사랑과 희생만이 강요되는 사회에선 경제적 목표가 반항이고 급진이다. 반대로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선 사랑 같은 추상적 가치가 급진이다. 우리에겐 빵과 장미가 둘 다 필요하다. ‘우리의 일생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달콤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육체만큼 굶주려 있다.’ 그러므로 빵을 달라, 하지만 장미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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