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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모두가 다리 없는 새의 꿈을 꾼다

왕가위 <아비정전>

사람들은 유독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른 곳에 있는 각기 다 다른 사람들이어도 모두 자신이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고 고독하다고 느끼나 보다. <아비정전>도 아비의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외에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도 한명 한명 모두가 외롭다. 수리진과 루루도, 경찰관도 이름 없는 친구도, 아비의 양엄마와 친엄마도 심지어 쿠키 영상에 나오는 차우까지도 <화양연화>에서 외로울 예정이다. 모두 자신들이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에게 받아 들여지고 싶어할까? ‘사람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명제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말하라고 한다면 모두 거짓이라고 대답할 것 같은데,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일까? 이제 이성과 감성이 분리된 기제가 아니란 걸 깨달은 나는, ‘성격'이나 ‘감정'처럼 사람들에게 막연하게 신비한 추상 속의 무언가라고 믿어지던 것들이 사실은 복잡한 뇌내 화학 작용의 산물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유한 캐릭터를 더해주는 어떤 영혼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기계적이고 육체적(뇌도 육체의 일부니까)반사 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기계적이라고 해서 단순하단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신비성 보다는 복잡도가 높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그닥 반기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이 사실은 해독(decode)될 수 있고 자신의 영혼에 더 이상 신비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랬다. 이유라면 글쎄, 아무래도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비성이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 인간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앞서 타인에게 완벽하게 이해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선행하는 걸지도.      



피 흘리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다리없는 새 이야기를 하는 아비에게, 선원(전직 경찰관)이 그런 이야기는 꼬시려는 여자에게나 하라며 핀잔을 주는 장면에서 문득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외롭고 싶어한다. 타인에게 완전히 읽히지 않는 안개 속의 자아를 갖고 싶어한다. 그런 동시에 그 안개가 또 다른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일순간 걷히길 원한다. 성인 인간의 뇌는 너무 지나치도록 복잡하게 발달해 버린 나머지 스스로도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모두가 자신을 다리 없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비행해야 하는 — 하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 고독한 새라고 생각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진짜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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