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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9. 2020

좋은 밤 되시고, 행운을 빕니다

조지 클루니 <굿 나잇 앤 굿 럭>

나의 계정 프로필에 쓰여있는 소개 문구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우스 시저>를 인용한 에드워드 머로를 인용한 것이다. <줄리우스 시저>는 읽지 않았으니 그 책을 인용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에드워드 머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대학교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보여준 영화 <굿나잇 앤 굿럭>에서였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양심에 따른 보도와 방송국 상위권자의 경고 사이에서 갈등하던 머로가 스탭들과 함께 결국 매카시즘에 눈이 먼 미국을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을 방송하며 <줄리우스 시저>의 구절을 인용한다. “Good night and good luck”은 저녁 시간대에 방영되던 에드워드 머로의 방송 끝 인삿말이다. 르포 후 자신의 논평을 덧붙이고 가장 마지막에 저렇게 인사를 하며 방송이 끝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영화를 보여준 교수님은 존경할 만한 어른은 아니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후 전공 교수들 중 한 명이 대학원생의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었을 때 이 교수님은 가해자 탄원 성명을 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 인생에서 68혁명이나 에드워드 머로 같은 언론인을 알려주며 저항 정신에 대해 교육한 첫 번째 어른이 미투 운동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니, 참 씁쓸한 아이러니다.  



양심과 정의를 좇는 언론인에 대한 영화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지침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그렇게 살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처음 심어준 조우였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선택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긍정의 힘’이나 ‘시크릿’류 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진취성에 대한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의 나이가 되기까지 나는 다른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은 하는 것 외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매 순간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에 따른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 때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불만도 많고 비판점은 어디서든 무엇이든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냈던 나는 늘 이런 성향에 대해 비난 받으며 자라 왔었다. 고쳐야 할 비뚤어진 심성이라고 교육 받아 왔었다. 언론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이 더 나은 세계로의 연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 나의 시선 그 자체로, 세상의 의미 있는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초대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긍정하고 수용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의 일부였던 것이다.


언제 처음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자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의 쓰는 일은 불만족과 분노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희안하게도 이 별 것 아닌 과정 – 생각을 정리하고 손 근육을 움직여 문자로 적어내고 문자들이 읽기 좋게 짜여지도록 재정렬하는 – 이 과정이 나의 사고가 논리적이 되도록 도와주고 감정의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는 것을 발견 했다. 쓰는 시간이 쌓여갈 수록 징징거림과 비판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끊임없이 충돌하는 갈등의 순간에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빠르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소셜 채널들 계정 아이디를 굿나잇 앤 굿럭으로 만들고, 프로필에 에드워드 머로의 인용구를 써놓는 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리마인더 같은 거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이들과 어울려 살든, 변하지 않고자 하는 나의 본질이다. 항상 바른 선택을 한다거나 양심에 따라 살겠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항상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런 믿음이 굳건해 지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 그러니까 말하자면 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내가 늘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과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 불가항력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지, 쓰는 행위를 통해 계속해서 스스로와 주변과 그리고 세상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는 것.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주장하고 가르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 글을 올리고 있지만 이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것 뿐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고 가려진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쓰는 행위는 밤에 하는 명상에 가깝다. 밤의 명상 시간에 나는 늘 좋은 밤이 되길, 그리고 행운이 함께 하길, 스스로에게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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