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SF 장르는 옛날에는 우주적,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픽션들을 일컬었지만 요즘은 장르적 특성이 확장되어, ‘SF란 어떠어떠한 장르다’라는 설명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장르가 되었다. 굳이 장르적 특성을 한 가지만 집어 보자면, 설정에 제한이 없는 픽션 정도로 말해 두어도 될 것 같다. 현재 우리에게 없는 새로운 기술이 구현되면 인간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 같은 상상력은 이미 낡은 지 오래다. 너무 많이 사용된 주제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걸 굳이 ‘상상’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기술이 구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해 보는 것 자체가 구태의연해졌다. SF로 구분되는 장르를 감상할 때 굳이 과학이나 상상력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대한 감상도 이와 비슷하다. 대중적으로는 이 책을 SF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과학적 상상력에 의해 설계된 소설 속 세계들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도 비현실인 것은 등장하는 인간과 인간과 비슷한 존재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저열한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고 거의 평생에 걸쳐 타자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는 선택은 실리적이지 않다. 그들이 찾아내고자 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의식적(ritual) 행위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안나는 고집스럽게 이미 100년도 전에 지구를 떠난 가족이 향한 행성으로 떠나고자 매일 폐쇄된 우주선 정거장을 찾는다. 그들이 자기처럼 딥프리징 같은 온갖 방법이라도 동원해 삶의 시간을 연장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한 걸까? 실낱 같은 희망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슬렌포니아를 통해 떠났다는 것을, 이승이든 저승에든 있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족 대신 자신을 선택한 것을 속죄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 속죄를 위해 자신의 남은 평생에 걸쳐 그들만을 생각하고 모든 시간을 그들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노력에 모두 바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킨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재경과 가윤이 심해로, 우주로 가고 싶어 하는 것 또한 그렇다. 현실 세계 속의 인간이었다면 온갖 사회적 통념과 압박 속에서 거의 평생을 보내온 여성인 재경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지켜온 꿈을 실현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모두의 기대와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란. 재경이 현실의 인물이었다면 결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을 것이다. 가윤과 서희가 재경의 마음을 헤어리고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조차 비현실적이다. 대외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가윤은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재경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 인간의 반응일 것이라고는 상상되지 않는다.
<스펙트럼>에 등장하는 루이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들이 인간과 비슷한 사회성을 가졌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체계를 유지하며 사는 존재라면, 그들에게 자신들보다 작고 약한 처음 보는 생명체가 등장했을 때 윤리적인 방법으로 그 생명체를 존중하며 대를 이어 관찰해 가는 인내심이 있을까?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고양이나 개 같은 동물들조차 이종에게는 인간의 윤리가 법적으로 촘촘히 적용되지 않는 편리함을 이용해 그들을 학대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 있는데.
이들에 비하면 <공생가설>에 등장하는, 이타심과 배려심과 그 외에 모든 추상적 관념을 학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질이 인체가 내재한 DNA에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차라리 현실적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본 적 없는 행성에 살던 미지의 존재에게서 부여받은 완벽히 ‘비인간적’인 속성이고 인간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존재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단 설정은, 인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설득력을 가진다. 그토록 이상적인 특질을 온전히 보전하며 살아가거나 최소한 그런 특질들을 잊지 않고 꾸준히 함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을 마지막으로 본 적이 언제인지 다들 기억조차 못할 테니까.
실제 세상에서 추하지 않은 인간을 보고 마지막으로 그 깨끗함에 감탄한 것이 언제였더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오며 이런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없다’가 정답이란 점이 이토록 씁쓸한 뒷맛의 이유가 아닐지.
(사진 : 시카고 Adler 천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