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스미스 <저스트 키즈>
이 회고록에는 굉장히 많은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지만 그중 나에게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패티 '리' 스미스가 얼마나 현실적인(down to earth) 시각을 지닌 사람이었는지였다. 흔히들 위대한 아티스트는 즉흥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을 지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매 순간 번개처럼 떠오르는 예술적 영감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아티스트의 스테레오 타입 성격에 더 가까웠지만, 패티 리는 전혀 아니었다.
겨우내 프랑스에 가겠다는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스크라이브너에서 일을 더해서 돈을 모으고 경유지를 고르고 아틀리에와 작가들의 묘지 위치 목록을 만들고 하면서 여동생과 나를 위한 맞춤형 여행 일정을 짜 나갔다. 누가 보면 우리 자매군이 침공 작전이라도 짜는 줄 알았을 거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패티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동생과 함께 생전 처음 가는 해외여행을 위해 세세하게 일정을 계획하는 그녀가 인간적으로 너무나 가까이 느껴졌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생활비로 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구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쓰며 로버트와 함께 자기가 동경하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그녀가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분출해 스타가 될 수밖에 없던 운명적 아티스트가 아니었다는 점이, 정말 너무 좋았다. 그녀에게 예술적 재능 이전에 꾸준히 글을 쓰는 성실함과 여러 가지 고통을 겪어낼 수 있는 인내심이 없었다면 <글로리아>의 가사도 없었을 것이고 <Horses> 앨범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수수한 옷을 입고 출근하는 그녀의 모습도, 드랙퀸들과 어울리며 뉴욕의 클럽에서 시낭송을 하는 그녀의 모습도, 맘처럼 글이 써지지 않아서 랭보의 영혼을 찾아 프랑스의 낯선 마을을 정처 없이 배회하는 그녀의 모습도 모두 다 좋았다.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뿐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두가 다 사랑스러웠다.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영감과 인간적 자립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 날의 초상들에 대한 연민도 섞여 있었다. 등장인물들 모두 이 회고록 속에서 점점 나이가 들어가긴 하지만 첼시에서 배를 곯으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만들던 그 아티스트들 대부분은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전 '그냥 아이들'이었으니까.
"패티, 아무도 우리처럼 보지 않아."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합리성에 기반해 합의된 언어를 가지고 서로 소통한다. 합리성은 다른 말로 효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합리성과 효율은 뜻을 관철시키고 상대방의 의중을 읽어내고자 하는 목적성을 지닌다.
그럼 만약 언어가 합리적이지 않다면? 만약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합리성이 아닌 어떤 관념이 존재한다면? 논리의 언어라는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바람처럼 우리 주위를 둥둥 떠다닌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붙잡아서 어떤 형식을 부여해 표현할 것인가? 예술가들은 바로 이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언어가 채우지 못하는 공간을 채우고,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 말이다. 그래서 예술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끌어안고자,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젖어들지 못하는 것들에 몰입하고자 몸부림쳐야 하는 과정이라서.
그리고 아직 예술가가 아니거나 영원히 예술가가 되지 않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일상적 언어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것에 대해 탐구하고 느끼고 축적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사회적으로 '취향' 혹은 '코드' 같은 말로 표현하는데, 그런 존재들이 으레 그렇듯 고루한 언어의 형식 속에 담는 순간 그 존재들은 변색된다.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메이플소프의 사진들 앞에서 생각했다. <저스트 키즈>에도 쓰여 있지만 메이플소프는 주제의 선정성이나 화제성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BDSM 같은 소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걸, 그는 진정으로 그런 것들에 빠져있었고 그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페르소나의 일부였다는 점을,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걸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적절하고 부적절하다거나 정상과 비정상 같은 언어로 메이플소프의 페르소나와 사진에 담긴 미학들을 적확하게 묘사해낼 수 있을까. 그 다음날 부산 국제갤러리에 가서도 다른 사진들을 보았는데, 우아한 난초꽃 사진과 가죽옷을 입고 체인에 매인 남자들의 모습이 서로 상반되거나 양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이플소프라는 한 인간 안에서 끈끈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듯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들의 신체 구석구석과 항문에 딜도를 꽂은 자신의 자화상을 찍으며 메이플소프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자기 안의 그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술가들만큼 예술을 사랑할 수 있을까? 편하고 쉬운 것만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지는 몰라도, 언제나 심정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금전적으로도, 예술가들을 지지하고 끊임없는 애정을 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비어있는 말들의 공간을 채움으로서 이 세상을 한 차원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6Wz3i_BYU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