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히토 슈타이얼
역사를 평가하고 기록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에 대해 언어로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낡은 이론이기는 하지만)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말처럼 역사는 정말 선형 형태의 전진을 끝마친 종말의 상태인 걸지도 모른다. 동시대에 대해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비단 내가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성이 있는 시대기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이 시대가 실제로, 말하자면 ‘춘추전국시대’처럼, 모든 것이 파편화 되는 동시에 통일되고 글로벌화 되는 동시에 로컬화 되는 혼돈의 시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첫 챕터를 읽었을 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이지? 아니, 말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말들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슈타이얼의 언어들이 어떤 조형을 이루고 있는지 어렴풋이는 알겠는데 그 ‘어떤 조형’을 내 스펙트럼 내의 언어로 다시 표현(paraphrasing) 해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텍스트들을 나의 세계와 호환시킬 수가 없었다. 알겠는데 모르겠다. 아마 히토 슈타이얼이 이 책의 원문을 쓸 때는 독일어로 적었을텐데, 독일어가 갖가지 관념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어휘를 가진 언어란 점을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한국어로 번역된 <면세미술>을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인 동시에 바벨탑 너머의 사람들처럼 어차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용쓰는 것 아닌가란 회의감도 동시에 밀려온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행간에 가려진 어떤 의미심장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현대의 현상 그 자체를 텍스트로 묘사하는 것”이라는 전제로 생각을 바꾸고 나자 히토 슈타이얼이 하는 이야기들이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게임이론에 관련한 챕터는 (내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동시대의 양상에 대해 가장 충격적이자 명확한 설명 중 하나였다. ‘대중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많은 평론가들이나 작가들이 대중의 비합리성 대해 이야기 할 때 너무나도 쉽게 snob의 함정에 빠진다. 대중이 지닌 부정적인 속성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기술할 때 어떻게 ‘상대적 우월감’을 완연히 배제하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챕터는 내게 그에 대한 모범 답안 같았다. 이 세상이 비합리적이란 증거는 합리성에 기반한 이론이 ‘게임’ 이론이고, 인위적인 세계관과 법칙 위에 세워진 게임만이 합리성의 산물이란 점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그 슈타이얼의 이야기만큼 명징하고 담백하게 인간의 집단적 비상식에 대해 설명한 글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백신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서 혈전이 생성 돼 사망할 확률과 백신을 맞았을 때 혈전이 생겨 사망할 확률은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객관적인 숫자에는 관심이 없다. 0.008%의 확률보다 “백신을 맞고 누군가 죽었다”라는 명제를 더 ‘맞는 진실’이라고 받아 들인다. 최근에 어떤 친구와 통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거대한 벽에 부딪친 기분이었다. 통계가, 숫자가, 사람들이 점점 결혼을 늦게 혹은 하지 않거나 아이를 출산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다고 내가 말했다. 통계는 행동에 후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통계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통계만 그렇지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통계가 그렇게 나타나도 사람들은 상관없이 자기 하고싶은 대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저 항변이 나의 어떠한 주장에 어떤 대립각을 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단 나는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주장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고 그냥 핵가족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 변화에 대해 설명한 것 뿐이었는데 저 명제들은 내가 말한 무언가에 강력히 반대하고 싶은 심중은 느껴지지만 무엇을 지적하고 주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왜 그럴까? 비합리성에 이유는 없다. 그냥 인간 종의 행동 양식이 그렇다.
그러니까, 나 같이 기표와 기의(내가 실질적 존재라고 믿는 어떤 것들의 총칭)를 짝지어야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인이 이런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그냥 이렇게 ‘몰라 세상 사람들이 그렇더라’ 같은 표현밖에 쓸 수 없지만 히토 슈타이얼처럼 이 모든 것을 따로 분리할 수 있고 관념을 실제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면세미술> 같은 책을 쓸 수 있는 것인가보다, 싶었다. 그리고 미술-예술도 그런 것이겠지, 싶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이보다 훨씬 훨씬 더 많다. 하지만 나의 빈곤한 언어 라이브러리에 억지로 호환시키려 했을 때, 이 책에 담긴 컨템포러리의 개념들이 왜곡되거나 평탄화 될 것 같다. 나는 슈타이얼의 글이 논픽션 버전의 보르헤스 같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무언가를 대변하는 기표가 아닌 언어 그 자체로서만 존재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오롯이 그 자체만으로도 실재일 수 있겠구나, 다시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