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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이야기

프리즌 브레이크

<백내장> 존 버거

by Good night and

가끔 나의 육체가 내 존재의 물리적 작용을 도와주는 도구가 아닌 나를 제한하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은 주로 내 근육과 관절들이 내 생각만큼 자유롭게 움직여지지 않을때, 혹은 부상이나 질병 등으로 신체에 고통이 느껴질 때 들곤 한다.


30대가 되고 나서는 몇 시간씩 짬이 생길때마다 그저 누워있기 보다 뒷산이라도 오르고 동네 수영장이라도 가는 것이 일상이 돼 있는데, 내 자유의지대로 수족을 움직이고 호흡을 제한할 때 느껴지는 해방감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의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생업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내 의견을 타진할 때 방에 누운 육체의 머리에 뭔가를 연결해서(?) 가상 세계에서 그 작업들을 수행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매트릭스가 자유의 세상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어쨌든 지금은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원하지 않는 장소에 내 육신을 끌고 가 주차해 놓고 손가락 정도나 꼼지락대며 가만히 대부분의 하루를 보내야 한다. 정신은 육체에 갇혀있는 걸까?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내 정신은 육체가 있는 곳에 함께 따라가 있긴 하다.


인간의 신체 매커니즘은 우습도록 비효율적이어서 움직이지 않을 수록 그 기능성이 저하되고 각종 질병의 공격을 받는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지칠 때까지 몸을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조금씩 단계적으로 효율이 좋아지는 근육의 움직임을 보는 성취감에도 중독 돼 있다. 이전에 들 수 없는 무게를 들어올릴 때, 저번주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리고도 숨이 덜 찰 때, 나에게 주어진 감옥의 면적이 조금씩 넓어지는 기분이다. 이 곳에서 탈출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가능성의 저변을 늘려간다는 성취감이 계속 근육을 움직이고 찢으며 단련하도록 한다. 그렇게 단련한 근육들에 통증이 느껴질 때 생각한다. 아, 나에겐 아직 육신이 있구나.


존 버거는 눈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던 사람이다. <백내장>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와 <사진의 이해>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버거의 책인데, 거침없는 필체로 시각 예술에 대한 비평을 쏟아내던 존 버거가 자신의 눈과 시력, 시각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렇게 조심스럽게 레고 조각을 한 개 한 개 분해하듯 작은 단위로 해체하듯 쓴 문장들이 너무 낯설었다. 처음엔 아예 다른 사람인데 동명이인인줄 알고 다시 검색까지 해보았다. 그림과 사진을 보며 자신의 세상을 구축하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좌절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명상록을 읽어가다 보면 버거는 자신의 눈에 드리워진 '내리닫이 창살'이 사물에 반사되는 빛의 모양새를 이리저리 바꾸어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라고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전과 다른 파장으로 퍼지는 파란 색조의 개성, 새롭게 정의되는 수평과 수직의 방향들. 버거는 자신의 정신을 운동하고 춤추게 하는 데에 능하다. 물리적 시각이 제약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지금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볼 수 없지만 그 일반적이지 않은 상태의 망막에 맺히는 상들에 대해 계속 묘사함으로서 자신의 언어가 감옥에 갇히지 않고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한다. 버거의 글과 함께 있는 셀주크 데미렐의 일러스트 속에서는 두개골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두 개의 눈이 계속해서 다른 모양으로 해체되고 변이한다.


마지막 장에서 백내장 수술 후 버거는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연한 다양성이 나에게 되돌아왔다.'며 전율한다.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의 소망이 얼핏 보인 것 같았다. 그에게도 육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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