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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이야기

아, 사랑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by Good night and

픽션을 많이 읽지 않기 시작한지 몇년이 된 것 같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를 엄청 많이 볼 수 있는 환경이 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마음에 여유가 많이 없었나-싶다. 텍스트로 그려내는 서정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는 뭔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것 같다. 그런 관념적 생각을 '묵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묵상을 해 본 것의 마지막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20대 후반까지는 그런 시간을 많이 가졌었고(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이 많았던 듯하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결과는 대부분 내 스스로에게 별로 건강하지 않은 것들이었는데, 혼자서 에세이 형태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우울한 기분들을 다루는 법을 알기 위해서였다.


작가의 활동기와 책이 출판된 시기를 생각했을 때 90년대쯤, 그리 멀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란 걸 알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책 속의 묘사들을 읽어내려 갈수록 그보다 훨씬 전 시대의 이야기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다. 픽션을 읽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혼자 모든 것을 이미지화 해서 생각해 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 소설은 읽을 수록 유선 전화조차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의 이야기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문체가 너무나 고아(古雅)해서 그런 것 같다. 원문(아마 영어겠지?)의 문장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고아하고 단정한 문장들로 쓰여진, 다소 복잡하고 불친절한 구성과 외려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의 소설을 읽어가며 다시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그 동안 픽션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는 것 말이다. 최근 몇년간 나는 사회적으로 많이 성장했고 세속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만큼 추상의 세계를 오래 잊고 살긴 했구나 싶었다-사랑이란 무엇일까? 같은 생각들 말이다. 니농과 지노의 사랑, 시한부 선고를 받은 딸의 결혼식을 향해 가는 부모님의 사랑...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 각자의 사랑도. 세상의 다른 많은 가치들이 그러하듯 사랑에 대한 탐구도 계속해서 질문만 남겠지만, 어쨌든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 질문에 대해 책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로 혹은 덜 정제된 나의 감각으로 느끼는, 모종의 답을 생각해 보는 묵상의 시간이 된 것 같다.


"이유는 묻지 않으마. 텅스텐이라는 금속이 왜 존재하는지 묻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텅스텐이라는 금속이 있는 건 분명하니까.(웃음) 사랑도 그런거 아니겠냐. 너한테는, 사랑이 텅스텐만큼이나 무겁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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