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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Nov 30. 2020

어디로 가야하죠 I just see

요제프 보이스 <우리가 혁명이다>

다른 외국어들도 다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어로 '예술'과 '매체'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전자는 왠지 고고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들고 후자는 좀 더 사무적이고 일상적인 느낌이 든다. '주말에 미술관에 가는 것이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느껴지는 것은 통상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유산계급 이미지에 가깝고 '매체'는 사실 전달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직업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니까.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기준으로 떠올릴 때 예술과 매체는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의 현대미술에 대해 떠올려 보면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되는 고상한 부가가치의 향유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현대미술은 그런 우아한 취미가 되기엔 너무 외설적이거나, 너무 파격적이거나, 너무 난해하다. 미적 고양감을 통해 종교 및 계급 의식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작품이 거의 없어서일까. 지금 우리가 보고 접하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미술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하부구조를 통해 상부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외침 그 자체에 가까우니까? 



보이스의 작품과 사상도 상당부분 이런 사회주의적 이론에 근거 하고 있다. 미술사적인 맥락과 보이스 개인이 그때 그때 심취했던 일련의 사회문화적 흐름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가 선보인 모든 개념(conception)과 작업물들의 태동은 그가 살고 있던 환경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선-인지 없이는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보이스와 플럭서스 그룹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던 시대의 아방가르드 대부분이 가지는 특징이다.


페스툼 플룩소름 플럭서스에서 선보여진 백남준의 <영 페니스 심포니>나 보이스의 <시베리아 교향곡 제1악장> 같은 퍼포먼스들은 지금 시대에 실시간으로 선보여진다면 남성중심주의적 성적 기표와 동물학대 등의 부적절한 행위로 지탄을 받을 것이다. 백남준이 샬롯 무어맨과 했던 작업들도 이 당시에는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논쟁의 주제였지만 2020년에 다시 선보여진다면 구보타 시게코가 자신의 자서전에 쓴 것처럼 '예술이란 이름 아래 여성의 성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일축될 것이다. 이런 '파격'들은 포스트모던마저 고전이 되어가는 지금 시대에는 고루한 것이지만 처음 선보여졌던 그 시대에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보이스와 백남준이 주축이 되었던 플럭서스도, 플럭서스 이전의 다다이즘도, 플럭서스와 함께 주로 거론되는 네오 다다이즘, 개념미술(conceptual art), 누보 레알리슴, 제로 그룹, 모두 선행해 존재하는 사조들이나 시대상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들이었다. 고전주의에 대한 반대, 다다이즘에 대한 반대, 모든 것이 혼재하는 포스트모던 그 자체에 대한 반대 등등.




이것은 결국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 돼야 함을 의미한다. 보이스가 1960년대부터 전성기를 맞이한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의 작품들은 한 늙은 백인 남자의 지루한 기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백남준과 샬롯 무어맨의 학구적 배경이 유연성 없고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이란 점을 모르면 그들이 무엇에 대해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반대하는 것인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어느 누가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지방 덩어리와 펠트 더미에서 그냥 우연히,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느끼겠는가? 지나가다가 옷을 벗고 첼로를 켜는 사람을 본다면 누가 그것이 '어그로'가 아닌 '퍼포먼스'라 생각하겠는가?


그렇다면, 현대에는 맥락이 없이 그 자체의 에스테틱으로 존재하는 예술은 불가능한걸까?




맥락이 없는 인간의 행위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대학생 때 친구에게서 “네가 하는 행위의 단 한 가지라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야” 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는 ‘그걸 누가 모르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것이 사실이라도 내가 매 순간 그걸 떠올리며 행동할 필요는 없잖아'라는 생각을 했었다.(당시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의 성취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했더니 스포츠 내셔널리즘에 대한 일장연설과 함께 나온 이야기였다.) 그 때는 이 말 자체가 심히 피곤하게 느껴졌었다. 맥락이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고 외부와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건 아는데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매 순간 스스로의 모든 언행을 나노단위로 분석하며 드러내야 하나. 스포츠 스타 한 명 롤모델 삼고 싶은 것도 내 맘대로 못하나. 그 때는 "어쩌라고" 같은 단순한 언어로 화를 냈는데 지금이라면 아마 이렇게 더 명료한 말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라고. 내 인생을 현대 미술로 살아야 되냐?"


로렌스 와이너, <A wall pitted by a single air rifle shot>


2012년에 뉴욕 모마에 갔을 때 로렌스 와이너의 작품을 본적 있다. 그 때는 개념미술이나 아방가르드에 대해 많이 읽어보거나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본 첫 눈에 대충 어떤 의미의 현대미술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얗고 널따란 벽에 볼드체로 쓰여진 '공기 라이플로 쏜 벽'이라는 텍스트를 읽자, 이것이 어떤 추상적 개념을 상징하는 형태의 작품이며 텍스트로 쓰여진 내용을 점, 선, 면 등의 시각적 요소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미술임을 주창하는 굉장히 "포스트모던"스러운 작품이란 의미란 점이 직관적으로 와 닿았다. 그렇다면 직관이 맥락을 떠난 이해일까? 하지만 결국 직관이란 것도 이미 내가 접하고 저장해 놓은 정보들을, 그 짧은 순간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뉴런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서로서로 전달해서 일어나는 작용이지 않은가. 직관도, 그리고 사람들이 이성의 영역이 아니며 자신의 어떤 진실된 영혼의 일부라 믿는 페이소스도, 사실은 제한된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로고스이며 형태와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모든 것이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한 점의 작품, 한 편의 퍼포먼스를 볼 때에 그에 수반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찾아야 하고 이해하며 이 작품이 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디코딩 해야 한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지만 어쨌거나 현대 미술의 많은 창작자들은 그런 태도를 기대하며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런 태도를 비웃기 위해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두 가지 다 어쨌든 한 마디로 '아름다운 작품이네요' 같은 직설적인 반응을 원하지 않는 미디엄이란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수용자들의 입장에서도, 양자택일의 자유 속에서 '해석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철저히 외부자의 시선으로 존재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 신랄한 평('이런 건 나도 만들겠다' '이런 걸 이해하는 척하는 것도 허영이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보면, 좋든 싫든 어쨌거나 현대미술이라는 대전제 안에서 담론을 펼쳐가기 위해서는 소수의 기표 뒤에 가려진 복잡하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기의를 이해해야 하는 점이 필수 사항으로 보여진다.


결국 필연적으로 현대미술은 복잡하고 유기적인 맥락 속의 해석을 동반한다. 공존하는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는 누군가에게 현대미술은 그저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 어쩌면 해석을 거부하는 반발심 자체가 이 다음의 현대미술이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또 전혀 상상하지 못한 어떤 반동이 또 나타날 수도 있다. 나는 그 점이 이 시대(contemporary) 현대미술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전작품보다 현대미술을 훨씬 좋아하는 것도 이 점 때문이다. 누구나 무엇이든 마음대로 망쳐버릴 수 있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갑갑함에 갇혀 있을 때 작품을 바라봄으로 얻을 수 있는 이 해방감은 사회적 기의를 떠나서라도 개인들에게 소중한 자산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완전히 그 반대로, 복잡한 것을 잔뜩 담고 있는 이상하고 못생긴 작품들을 바라볼 때,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하나하나의 행위'는 얘네들이 하고 있으니 나는 현실의 삶을 살면 된다는 해방감도 든다. 어쨌든 인터넷 상의 유명한 우스갯소리 '어디로 가야하죠 I just see'-노래 가사의 아저씨를 i just see로 잘못 들었다던-처럼 이 리바운드가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는 채 계속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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