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night and Dec 16. 2020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넷플릭스 <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

오래되고 고된 무언가를 마무리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나는 어느 해가 됐든 연말을 맞이할 때 가족-따스함-파티 분위기보다는 올드 랭 사인을 부르며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쓸쓸한 기분을 더 좋아한다. 그 한 해에 만족하든 안 하든, 좋았던 나빴던 어쨌든 한 해를 살아냈으니 맞이하는 마지막 달이다. 남들이야 어찌 평가하든지 어쨌든 나는 내 인생에 1년 치의 무언가를 또 적립했고 살아내야 할 한 해를 마친 것이다. '끝'은 두렵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한다.



<아이리시 맨>의 200분이나 되는 러닝 타임을 어찌어찌 견뎌내고 영화의 마지막 결말 부분에 이르면 실제로 1년 정도는 산 기분이 든다. 영화에서 내내 보여주는 길고 자세한 마피아 생활의 묘사는 실제로 아일랜드 출신 백인 범죄자의 인생을 함께 살아온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함께 늙어버린 듯 지친 기분이 들 때쯤 왜 스콜세지가 작정하고 영화를 이렇게 길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양로원에 홀로 앉아 있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으로 분장한 로버트 드니로의 모습을 보며 드는 복잡한 감정은 노쇠하고 힘이 없어진 주인공에 대한 연민은 아니다. 그를 동정하기엔 우리는 그 남자가 저지른 너무 많은 죄악을 200분 내내 목격했다. 인간에게 늙고 초라해졌기 때문에 사함 받을 수 있는 죄란 건 없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노인의 얼굴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며 그 순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정당화했던 그의 젊은 날 마피아의 모습이 겹쳐질 때 우리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의 정체는 의문이다. 그 모든 잔인함과 비인간성은 뭘 위한 것이었을까? 자신의 딸들에게 너희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자기가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든 것이 있다고 변명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 짙은 회의감이 느껴진다. 진심으로 모든 순간 그렇게 믿었을까? 이제 와서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선택에 의한 득과 실은 결국 인생의 말년에 이르자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순간순간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 무엇이 ‘좋은’ 선택이었을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공포의 이반'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뎀얀유크라는 남자가 있다. 같은 제목의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를 보고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뎀얀유크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가담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데에 동참했다. <아이리시맨> 속 프랭크 시런은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외면받는 말년을 맞이했지만 뎀얀유크는 실제로 전범 재판을 받으며 끔찍한 악행이 까발려지면서도 가족들의 무조건적이고 따듯한 사랑을 받았다. 말년까지 그는 가족들의 보호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하고 가난한 삶,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삶, 학살자의 삶, 부귀영화를 위해 타인을 서슴지 않고 짓밟는 삶, 이 모든 선택지는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삶은 각각 독립되어 있고 권선징악 같은 인과관계는 실제로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살면서 저지른 악행들에 대해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느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죽음은 목전에 와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회개의 기도문을 중얼거려 보는 것 밖에는 없다. 역으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해 왔지만 그 대신 타인에게 짓밟힌 가여운 인생들에게도 딱히 그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은 없다. 사후 세계를 믿는다면, 죽음이 안식이란 것을 믿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우리는 훗날의 무언가를 임의로 상상하며 선택할 수 없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살아가는 도중의 모든 선택에 대한 기준은 결국 단 한 가지의 확실한 사실, 죽음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설령 존재한다 해도 인간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그 존재에 대해 알 수도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그걸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온 시내가 루미나리에로 반짝거리고 울려 퍼지는 캐럴로 가득 차 있을 때, 모두가 쓸쓸함과 설렘과 자신의 삶에서 밀려오는 각종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내가 끝나가는 한 해를 보내며 생각하는 것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죽음을 기억하라. 이 문장은 전혀 슬프거나 허무하지도, 동시에 위로가 되지도 않는다. 굳이 나의 느낌을 묘사하자면 ‘고요하다’ – 나는 연말의 고요 속에서 되뇐다. 언젠가 반드시,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방 안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