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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Dec 15. 2020

어떤 방 안에서

방 안에 앉아, 방 안에서 찍은 영화들을 봤다.

최근에 <이창>(알프레드 히치콕, 1954)을 보고 왠지 모를 이질감(이랄지 신선함이랄지)을 느꼈는데, 영화가 끝나고서 생각해 보니 주인공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방 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시각 효과나 특별한 미장센 없이 내러티브 그 자체로 이끌어가는 영화를 아주 오랜만에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연출된 것으로 유명한 영화를 떠올려 보면 <12명의 성난 사람들>(시드니 루멧, 1957)과 <대학살의 신>(로만 폴란스키, 2011) 정도가 떠오르는데 이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가장 최근 것이 10년 정도 전 영화니까. 


제한된 공간을 쓴다는 점에서 이런 영화들은 연극적 무대 연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난 사실 연극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극장 내 라이브 공연에서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과장된 연기가 내 취향에 맞지 않기도 하고 나 스스로 장치적 상상력이 부족하다 보니 '있다고 상상해야 하는' 설정들 때문에 몰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연극보다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영화들에 더 몰입이 잘됐던 이유는, 일단 영화 제작 과정에는 카메라와 오디오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니 배우들이 과장된 발성이나 제스쳐를 할 필요가 없고 그에 따라 연기는 좀 더 섬세해진다. 표정이나 목소리 톤 등을 좀 더 미세하게 조절해야 하고,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화면 속 배우의 신체 표현을 계속 주목하게 된다. 


배우의 디테일이 더 포커싱 되는 동시에 장소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영화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화면 속 장소는 여기저기를 다른 곳으로 전환되지 않고 거의 고정된 삼각대 위에 세워놓은 카메라처럼 움직인다. 특히 창문조차 없는 방으로 연출된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보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빠르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대화와 기침 소리 같은 것들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요소다. <대학살의 신>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고정된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 놀이터의 아이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아이들 사이에 갈등 양상이 나타나는 시점에서 카메라는 시선이나 동선을 따라 다른 장소를 비추며 이동하지 않고 서로 싸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금씩 줌인할 뿐이다. 고정된 장소 안에서도 더욱 더 인물을 향해 포커싱 한다.




갈등의 양상은 시청자로 하여금 영화에 더욱 몰입하도록 하는 또 다른 요소다.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대학살의 신>에서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인물들이 이미 갈등 속에 놓인 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미 어떤 사건은 벌어졌고, 등장 인물들은 거기에 이해관계 혹은 견고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존재다. 이에 따라 제한된 발화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예의를 차려야 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의중을 읽어내야 하고 또 흐름에 따라 알맞게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상황에 관철시켜야 한다. 아주 어렵지만 해내야만 하는 과제에 당면한 인물들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롭고 모두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빨리 이 갈등을 정리하고 싶은 사람과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원하는 것도 생각하는 방식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통일된 결론을 내려고 애를 쓰며 갈등은 점점 고조된다.


인간들은 음성이든 문자든 수어든, 언어로 구성된 대화로 소통하는 존재다. 대화는 단순한 표식이나 언어가 아닌 신체적 감각을 이용한 소통보다 훨씬 첨예하고 정확하다는 점에서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과 대화를 해 보면 언어체계가 없는 동물들과 별반 다를 바 없거나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도 별 결실이 없는 무의미한 소통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학살의 신>에서는 양쪽의 부모가 서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 - 자기 아이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인증 받는 것 -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대화할 때는 소통이 되지 않다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그저 내뱉기만 할 때에는 분위기가 오히려 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격하게 틀어진 감정 그대로 끝나지만 말이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는 살인 용의자가 된 소년의 유죄 혹은 무죄 여부를 가려내기 위한 배심원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을 늘어놓지만, 여기에도 하나의 뚜렷한 결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두 영화 속 인물들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무너진 바벨탑 아래의 사람들 같다.


<이창>의 내러티브는 살짝 다르다. 인물의 감정의 변화와 대화 양상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서스펜스를 연출하는 실험에 가까운데, <이창>은 처음부터 주인공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모두가 창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대도시 속 무더운 여름에 다리를 다친 한 남자는 창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이웃의 어떤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며칠 동안 직접 걸어다닐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을 동원해 자신의 창 밖에서 벌어지는 그 갈등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은 방 안을 나오지 않지만 시청자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 의심하고, 체념하고, 두려워하고, 확신하게 된다.




한정된 물리적 장소 안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많은 것을 한다.


2020년은 지구상의 모두가 물리적으로 제약 받는 한 해를 보냈다. 나라 간의 이동은 물론이고 집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일상이다. 요즘은 며칠씩이고 집 밖에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일도 다반사다.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도 가물가물할 때가 많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터넷을 통하지 않으면 아예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곳이던 모르는 곳이던, 사람들의 방 안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에겐 안락하고 따듯한 방이 있고 누군가에겐 바이러스가 퍼진 바깥 세상보다 위험한 방이 있을 것이다. 매일 창 밖을 바라볼 때에 어디든 인간이 있는 곳에는 사건이 있고 삶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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