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테라스 하우스>
도쿄, 하와이, 모델, 의대생, 아티스트, 프로 서핑 선수, 수영장이 딸린 테라스 하우스. 이 단어들을 연달아 듣고 부정적이거나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릴 현대인은 아무도 없다. 모두 반짝반짝 빛나고 젊음이 묻어나는 키워드들이다.
<테라스 하우스>는 젊은 또래 남녀들이 셰어 하우스에 산다는 콘셉트 하에 벌어지는 일들을 담아내는 관찰 리얼리티 쇼다. 누구나 동경할만한 장소에 세련된 대저택을 마련하고 거기에 누가 봐도 멋지고 잘난 젊은이들을 모여 살게 한다. 젊어야 하고 외모는 수려해야 하며 라이프 스타일에는 ‘힙스터’나 엘리트’ 요소들을 하나라도 갖추어야 한다. 인구통계적 측면에서 호감을 살 수 없는 지표에 속한 사람들은 여기에 낄 수 없다. 도쿄 구석구석 힙스터들이 찾는 가게들, 푸르른 와이키키 해변에서 서핑하는 몸 좋은 젊은이들이 매화 등장하고 젊은이들이 꿈과 사랑에 대해 열정적으로 대화하고 감정을 들켜버리는 순간들이 매화 방영되는데 심지어 이것이 모두 ‘진짜’란다. 매일 인스타그램을 보며 로망을 키워 나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 쇼에 담겨 있다.
2000년대 MTV의 <빅 브라더>의 흥행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베첼러>, <리얼 하우스와이브스> 그리고 한국의 <짝>과 <테라스 하우스>의 아류작이란 평을 듣는 <하트 시그널>까지,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리얼리티 쇼는 이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리얼’이라는 단어에 시청자들은 다른 어떤 마케팅보다도 호감을 느낀다. 텔레비전에서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라는 점이 구미를 당기게 하고 방송국은 실제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합법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테라스 하우스>는 패널들이 쇼의 시작 부분에 늘 같은 소개를 하며 시작한다."테라스 하우스는 서로 처음 만나는 남녀 여섯 명이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멋진 집과 멋진 차가 준비되어 있으며 대본은 전혀 없습니다."
정말로 대본이 없는 ‘쇼’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대본이 없다는 것이 제작진의 아무런 지침이나 편집이 없다는 뜻도 아닌데 왜 굳이 매 화 쇼를 시작할 때마다 이렇게 외치고 시작하는 걸까?
스튜디오에 출연하는 패널들의 대화를 지켜보면 모두가 맡은 캐릭터가 있음을 짧은 시간 안에 바로 알 수 있다. 이 중 한 남자는 속칭 '여우짓’을 간파하고 다른 이들이 사회적 체면을 차리느라 하지 못하는 말을 속시원히 하는, 일종의 밉상 캐릭터를 맡고 있다. 이 캐릭터가 일본에서 인기를 많이 얻어서 해당 패널은 스핀오프 격으로 유튜브 채널까지 개설해 활동했었고, 그는 주로 내숭을 떠는 여자 출연자들이나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남자 캐릭터들을 ‘속 시원히 까는’ 코멘트를 한다. 다른 패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변태 아저씨, 순진한 젊은 아가씨, 능청스러운 아줌마 등 각자 맡은 역할 내에서의 코멘트로 시청에 재미를 더해야 한다.
그렇다면 출연자들은? 자꾸 대본이 없다고 강조하니 그게 진짜 성격인 걸로 그냥 간주돼서 그렇지 가만 보면 출연자들도 다 캐릭터가 있다. 출연하는 사람들도 대본(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가가 표정이나 제스처 지문까지 직접 써서 매일매일 출연자들 손에 쥐어주는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에 따라 움직이지만 ‘리얼리티’라는 콘셉트 하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실제 페르소나를 드러내도록 강요받는다. 쇼의 제작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편집 기술을 통해 한데 모아 그것이 그 사람의 일관된 성격인 것처럼 쇼를 꾸려 나간다.
일견 정의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출연자들, 그러니까 오히려 여러 가지 성격이 혼재하는 실제 사람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들은 금방 테라스 하우스를 “졸업”하거나 아니면 다른 출연자들에게서 끊임없이 ‘네 본모습이 뭔지 모르겠다’는 지적을 받는다. 다른 출연자들에게 지적받지 않으면 패널들이 스튜디오에서 그 출연자에 대해 의뭉스럽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정의 내린 다음 그 성격을 도마 위에 올려 공격한다.
결국 <테라스 하우스>의 주인공들과 패널들은 모두 연출가,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어떤 페르소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이 대본이 없는 실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테라스 하우스>를 구성하는 통제된 장소 및 시간, 모집단(population), 이런 요소들을 보면 티브이 쇼가 아니라 일종의 실험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인데 이렇게 특정된 상황이 정말 실제일까.
모든 창작물들에는 창작자의 페르소나가 들어간다. 소설이든, 영화든, 예능이든, 방식이 다를 뿐이지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에는 만든 이의 인간성의 파편들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이건 창작자가 페르소나 분리가 잘 되는 사람이든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든 상관없다. 창작자는 자신의 인지 선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페르소나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이고 사람의 진짜 자아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불리하면 그 가면을 벗어던져 버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배역’이지 페르소나가 아니다. 가끔 장년층이 주로 보는 막장 가족 드라마에서 악역 역할을 맡아 유명해진 배우가 일상생활에서 공공장소에 가면 어른들이 자신을 드라마 속 배역 이름으로 부르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혼낸다는 일화를 웃으며 인터뷰에서 얘기하곤 한다. 그들이 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배역일 뿐 자신의 페르소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역은 자신이 아니다.
페르소나는 인간성의 한 면이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은 다면적이고 여러 차원의 사고로 구성된 존재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파편도 그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만이 그 사람의 인간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예능을 소비하는 시청자들에게 이런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만한 풍부한 관용은 장착돼 있지 않다. 그들은 8시에 본 일일 드라마 속 주인공과 넷플릭스 속 리얼리티 예능 출연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테라스 하우스>는 이렇게 몰인정한 시청자들의 특성을 중화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역과 페르소나의 경계를 더 모호하게 만들어 '어그로'를 끈다. 이 쇼는 패널들의 입을 빌려 한사코 이것은 모두 실제상황이며 어떠한 연출도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임을 표명한다. 한시라도 시청자들이 몰입을 못할세라, 모두가 모든 것이 진짜인 것처럼 연기를 하며 쇼를 이어간다.
<테라스 하우스>의 이 위험한 줄타기는 2020년 출연자 기무라 하나의 죽음으로 결국 끝이 났다. 일본 사회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익명 대중의 사이버 불링 행태를 떠올려 보면, 익명의 대중이 스스로 안전하다고 확신할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시청률과 화제성으로 보아 리얼리티 예능은 당분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측정 가능한 트래픽이 매 시간 수집되는 인터넷 VOD 시대에 조회수 장사는 더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다.
바뀌어 버린 방송 패러다임에 대한 규제는 아직 콘텐츠와 소비자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형법으로 사이버 불링을 처벌할 근거도 명확하지 않고 더더군다나 가해자가 불특정 다수인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일본의 법은 잘 모르지만 아마 기무라 하나의 유가족들도 방송 제작사에게 민사 소송을 걸거나 기무라의 SNS에 댓글을 단 사람들을 하나하나 추적해 IP를 직접 모으는 식의 방법밖에 법에 호소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른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자신들이 만드는 것이 픽션이 아닌 리얼이라고 홍보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사람이라는 콘텐츠는 물성(physical properties)으로 설명되는 객체가 아니다. 이 부분을 간과하는 방송 제작자들은 앞으로도 유죄를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