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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Sep 13. 2020

고뇌하는 여자들의 사회생활

FX on Hulu <미세스 아메리카>

언제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내 화법이 교육에 효과적일거라 생각한 매니저나 선배들이 나에게 더러 주니어들을 트레이닝하는 임무를 맡기곤 한다. 월급쟁이니까 시키는 일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했지만 썩 내키진 않는다. 내가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리란 기대도 전혀 없고 눈에 띄는 결과도 없을텐데 괜시리 싫은 소리나 해서 주눅 들게 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싫은 소리를 안하면 되지 않냐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에게 저런 걸 맡길 때에는 자기들이 하고 싶은 싫은 소리를 대신하라고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고 사람을 가르치다 보면 싫은 소리를 안할 수 없다는 건 모두들 잘 알테니... 하지만 그래도 기왕 해야 하는 일이니까 1%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늘 이것저것 얘기해 주곤한다. 언제 어디서든 잘 할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내가 흘리는 이야기들 중에서도 자기에게 도움이 될, 자신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어떤 단서를 주울 지도 모르니까. 


얼마전에 1:1 멘토링을 맡게 된 여자 후배에게는 그래서,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좀 더 장기적인 커리어패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여실한 유리천장과 뼈에 스민 여성혐오적 문화가 만연한 업계에서, 근시일 내에 프리랜서나 전업주부가 될 계획이 있는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조직 내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올라가는 데에 있어서 남자들보다 배로 더 많은 문제에 부딪힐 수 밖에 없고 그만큼 더 많이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고. 그래서 팀 내의, 회사 내의, 나아가서는 업계나 더 큰 차원에서 여성 노동자들과 커넥션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눈앞에 주어진 일을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대해 본인이 어떻게 결정하고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고, 그 고민을 비슷한 상황에 있는 동료들과 나누며 토론하고, 그렇게 나아가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에는 분명한 결과적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듣는 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얼만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후부터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





<미세스 아메리카>는 서로 협심하고, 대립하고, 싸우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여자들의 역사다. 각 에피소드의 제목도 필리스, 글로리아, 셜리 등 다른 정체성과 상황 속에 놓인 여자들이 겪어나가는 일들에 대해 펼쳐 보여준다. 어떤 여자는 페미니스트고 어떤 여자는 아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자가 일구어 나가는 커리어도, 그 사람이 하는 주장도 모두 '여자의 일'이다. 필리스가 가부장제를 옹호하고 인권 운동을 공격하는 여자라고 해서 그녀를 미국 페미니즘의 투쟁 역사의 한 축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다. 좋고 아름다운 것만이 여자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한 여성이나 어떤 여성 집단에 대한 평가가 어찌 되었건, 여자들이 주체가 되어 대립하고 싸운다면 그것 자체로 '여자들의 역사'라는 것이다. 대통령도 남자고 그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도 남자인, 그리고 그 두 남자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상징들과 그에 얽힌 모든 평가들이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몇 년전 희대의 비리 대통령과 대통령 파면 판결을 내린 재판관이 모두 여자였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이런 것이 '우리의 역사'가 돼야 한다.


여성주의적 세상이 정의롭고 착한 우리 편 여자들이 패권을 잡고 세상에 불행한 여성이 한 명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본인이 그려 온 페미니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진짜 여성주의적 세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류의 여자들도 전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상이다. 2020년 때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섹슈얼리티를 포함하는 젠더 문제와 냉전, 빈부격차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 정립에서 탄생 됐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착함과 나쁨' 같은 대립각 자체가, 새로운 여성주의 패러다임이 타파해야 할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스펙트럼과 끊임없이 교차하는 각양각생의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러면서 동시에 또 어떤 부분과는 절대 섞여들 수 없는 시차적(parallel) 관점들도 함께 가지고 있다. 여자 후배들에게 '근시일 내에 결혼해서 전업주부가 될 계획이 있는게 아니라면'이란 전제를 이야기 할 때면 모두 보란듯이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나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혹시 어떤 선택을 할지 난 모르니까 회사에 계속 남아 있다는 전제를 주는 것 뿐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 순간 뭔가를 깨달았거나 혼이 나서 곤란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런 상황을 되풀이해서 겪을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여자들은 언제까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되면 회사에 남거나 혹은 전업주부가 되거나 라는 이 양자택일적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 해야 할까? 아직도 나와 나이 차이가 그다지 많이 나지 않는 여자 선배들 중에도 '남편이 충분히 돈을 잘 벌거나 집에 재산이 많으면 내가 나와서 일할 필요가 없지' 혹은 '전업주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이 가져오는 돈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회사에 남아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실제로 성별임금격차나 유리천장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사실 모두가 기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한 고민은, '사회를 떠나거나 남거나'가 아니라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지'거나 '이 업계에서 어디까지 해먹을 수 있을지' 같은 종류여야 하는 것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언제쯤 여자 동료들에게 '혹시 전업주부가 되고 싶은 맘도 있는거니' 같은 질문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아도 되는건지 까마득해져서 기분이 조금 우울해 지곤 한다. 




'역사를 쓴다'는 표현은 화자의 거창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역사라 부른다면, 어쨌거나 무언가를 만들고 기록하고 싸우고 그런 행위들을 통해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사라 한다면,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행위가 시간이 지나면 역사로 쓰여질 것이다. 아콰피나는 자신이 아무것도 대표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아마 본인이 죽어도 묘비명에 아시아계 미국인의 어떤 대표라고 쓰일 거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난 그것이 지금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여자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얘기인 것 같다. 그래도 몇년 뒤에 입사할 여자 후배들에겐 이런 이야길 안 해도 되겠지, 같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고뇌하고 싸우며 버텨간다. 월요일이 오면 또 출근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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