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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Aug 08. 2020

넌 그게 재밌니?

웃긴 코미디와 안 웃긴 코미디

올여름에 넷플릭스에서 <스페이스 포스> 시리즈가 릴리즈 된다고 해서 공개일까지 손을 꼽아 기다렸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TV시리즈로 늘 <오피스>를 꼽는 나는 스티브 카렐이 주연하고 오피스 제작진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길 듣고 기대감에 부풀 수밖에 없었다. 예고편도 웃겼다. 더 중후하고 상식적인 마이클 스캇이 되돌아오는 것일까? 거기다 제인 린치랑 리사 쿠드로가 출연한다고? 재밌을 수밖에 없는 구성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공개일이 되고, 에피소드 2까지 시청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고편이 제일 재밌는 거였구나.


생각해 보면, 재밌는 코미디를 보고 마지막으로 웃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2020년 들어서 한 번도 없었나 싶다. 스티브 카렐은 2019년에 <오피스> 리부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본인이 직접 '부적절한'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금 그 시리즈를 리부트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대사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마이클 스캇, 드와이트 슈르트 같은 인물들이 지금은 아예 대중 앞에 내보일 수 조차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오피스> 시리즈가 종영한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지금 굳이 마이클 스캇 같은 캐릭터를 굳이 되살려야 할 필요는 없다는 데에 강력히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코미디가 아닌 장르들에도, 실제 현실에도, 부적절한 '개저씨'들은 여전히 넘쳐나는데 그들은 전혀 마이클 스캇만큼 웃기지도 않고 역으로 그들이 사라진 클린한 세상 속 코미디도 안 웃기다는 점이다. 이 문제의 원인은 뭘까?




나는 2010년 이전 한국 코미디언들이 단 한 번도 웃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미국 시트콤에만 푹 빠져 있었다. 아직 진지하게 탐구해 보지 않아서 언어로 확립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던 때지만 외모 비하나 여성성 비하 같은 기제가 주를 이루는 한국형 코미디들이 웃겼던 기억 자체가 없다. 그게 왜 웃기는지 그 기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옥동자 같은 사람은 그때도 안 웃겼고 지금도 안 웃기다. 사람 자체가 하나도 안 웃긴데 얼굴이 못 생겨서 개그맨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든 웃음의 기제에는 자신의 현실감각이 작동한다. 슬픔이나 공포 같은 감정보다도 웃음은 '무슨 말인지 알아야' 수신자와 송신자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정보 값이 훨씬 많고 층위 또한 다양하다. 슬픔은 표면적 표현만으로도 전이되기 가장 쉬운 감정 중 하나고 공포는 어떤 존재의 미지(未知)에서 발로 하는 감정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특히 더 그렇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는데도 그냥 웃기거나, 누군가 웃고 있기 때문에 그 콘텐츠가 웃기다고 느끼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웃음은 필연적으로 이너서클의 구성원들을 타겟팅하는 코드다. 그리고 코미디는 다른 인간의 모든 소통이 그러하듯이 맥락적 소통이다. 단어 한 개, 단 몇 초의 신 하나만 앞뒤 자르고 분석하거나 반대로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웃음을 유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맥락에 대한 무언의 합의가 있는 상태에서 유발되는 것이 웃음이지 그 맥락에 대해 언어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순간 코미디의 모멘텀은 사라진다. 코미디는 그래서 쓰기 어렵다. 맥락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수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을 먼저 만들어야 하고 그 설정(맥락) 안에서 비꼬기, 과장 등의 여러 가지 테크닉을 써서 웃음을 만들어야 하니까.


<개그콘서트> 가 종영하면서 그 프로그램이 주도했던 어떤 코미디의 흐름과 대세적 콘텐츠들이 현재는 강하게 질타받고 전혀 대중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한국인들의 시대 의식 자체가 어떻게 옮겨 왔는지 알 수 있다. 이제 사람을 못생김과 잘생김으로 나누어 '못생긴' 쪽의 사람들을 타자화, 대상화 해서 사람의 외모 자체를 개그 소재로 사용할 수는 없게 되었다. 어떤 집단 속 여성들의 사회적 행동의 단편을 잘라와서 그것을 여성적 특징으로 규정하고 그런 특징이 얼마나 웃긴지 전시해도 아무도 거기에 공감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 어렸던 내가 그 당시에 레퍼런스를 못 찾은 것이겠지만, 저런 한국 코미디에 반해 미국 시트콤들은 훨씬 세련되게 느껴졌다. 얼굴에 그림을 그리거나 불룩한 배를 까지 않아도, 남자에게 '오빤 내가 왜 삐졌는지 몰라?' 같은 의문만 가득한 대사를 치며 유아처럼 말하는 여자를 억지로 연기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도, 그냥 드라마처럼 서로 대사를 주고 받는데 그게 너무 웃긴거다. 좀 더 보다보니 미국 코미디 코드에는 사캐즘이 주축 중 하나였고 그 중에서도 그런 쪽에 치우친 코미디들이 내 취향에 부합하는 블랙코미디란 장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오피스>의 마이클 스캇과 드와이트 슈르트, <파크스 앤 레크리에이션>의 론 스완슨이 가장 웃겼던, 지금도 베스트 코미디로 내가 손 꼽는 캐릭터들이다. 난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웃겼을까? 장편 시리즈의 특성 상 등장인물들과 어울리며 여러가지 좋은 점도 보여주긴 했지만, 일단 그 캐릭터들의 기본 설정과 언행 자체가 평소 불쾌하다고 매번 강력히 느끼지만 앞에선 절대 말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개저씨'들 말이다. 그래서 내가 평소에 불쾌하고 짜증났던 부분들을 '개저씨' 캐릭터들이 그대로 재연하고, 그들과 대척점 관계에 있는 다른 캐릭터들이 나와 같은 짜증을 겪고, 동시에 그 남자 캐릭터들이 미움과 업신여김을 받으며 희화화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코미디를 보면서, 나는 공통의 적을 둔 동지들과 마음껏 뒷담화를 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피스>에서 필리스가 회사 앞에서 변태를 만난 에피소드에서, 드와이트가 성범죄 예방책으로 여직원들에게 통금제도를 실시하자고 했을 때 팸이 특유의 염세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오피스>


<파크스 앤 레크리에이션>


그렇다고 미국이 페미니즘 선진국이거나 그 때 당시 PC(political correctness)의 나라도 아니었는데 왜 거기서는 이런 블랙코메디가 가능했을까? 문화적 정서의 차이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그 때도 모두 만연한 여성혐오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는 있었는데, 미국 아저씨들(방송 산업의 주류였던)은 본인들이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 자신들을 마음 놓고 희화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비 와인스타인을 거쳐 미투의 시대가 된 지금 그 어떤 중년 남성도 이런 관점에서 자기 비하 개그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 그 증거다.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모두가 과거에는 보통의 시대 정신이었던 차별적 언행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100% 안정성을 느끼며 이런 자기 비하 콘텐츠를 만들 수 없게 됐다. 이제 그건 자기 비하 코미디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르포가 돼 버릴 테니까...




그러면 새로운 세대가 만드는 코미디는 어떨까? 최근 1-2년간 내가 관찰한 현상이라 대대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시트콤과 스탠딩 코미디를 주로 관찰해 보면 여러가지 특징적 내러티브가 보인다. 동시에 그 내러티브에 대한 소비자층의 반응 또한 일정 양상을 띤다.


가장 먼저 도드라져 보이는 건 시청자들의 젠더 인식이 바뀌어 가는 과도기 중간에 낀 상태에서, 사캐즘 혹은 블랙코미디에 대한 이해 자체가 사라진 현상이다. 이 이슈의 주요한 당사자 축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여성들이 요즘 코미디 장르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는 모습들을 보긴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돌려 까기'보다는 '사이다'에 중독돼 있고 이전의 코미디들이 여성 혐오적 콘텐츠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은 한창 교훈과 페미니즘 서사에 몰두해 있다. 페미니즘 서사에도 종류가 많은데 이것이 앞서 말한  '사이다 중독'과 맞물려서 계속해서 전통적 여성 혐오적 이미지에 대놓고 주먹질하는 내용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최근 온라인의 페미니즘 인플루언서(다른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들에게서 좋은 코미디로 칭찬받는 TV 쇼들의 특징은, 다양성 논의 레벨이 '여자는 남자 없이 잘 살 수 있고 결혼은 미친 짓이야' '여자도 남자만큼/남자보다 웃길 수 있어!'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메시지가 기저에 깔렸다기 보다 그냥 저 문장을 말하기 위한 빌드업 꽁트 정도가 주 내용이다.


앨리 웡이 자신은 사회생활에 열심이고 싶지 않고 부잣집 가정 주부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 했기 때문에 안티 페미라며 치를 떨며 싫어하는 페미니스트도 본 적 있고 심지어 한두 명도 아니었다. 아시아계 여성인 앨리 웡이 그런 농담을 팔아서 미국 코미디계의 다양성 지분을 크게 늘리는 역할의 선두에 서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베이비 코브라>로 유명해진 앨리 웡이 아시아계 여성과 남성이 주연으로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를 제작해 넷플릭스에서 높은 시청 수를 기록했는데도, 그녀는 사회생활을 관두고 전업 주부가 되고 싶다는 농담을 했고 여러 남자와 자 본 경험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페미니즘적 코미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나는 픽션 작가도, 코미디 작가도 아니기 때문에 희극을 어떻게 써야 한다고 구체적 방향성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요즘 미디어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다들 맥락적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서사 속에서 인물들은 갈등을 겪고 서로 대립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정말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갈등은 그런 권선징악보다는 일상적으로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 인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런 전개 양상을 참을성을 가지고 지켜보는 시청자는 이제 거의 없는 것 같다. 모두가 즉각적 '사이다 썰'에만 환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요즘 발군의 코미디언은 역시 장도연과 박미선인 것 같다. 두 사람은 앞에 말한 맥락적 설정도 촘촘하고, 다수 집단의 권력에서 나오는 웃음(외모 비하나 특정 집단의 성격에 대한 일반화 등)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사람만이 정답은 아니다. 갑자기 건설적 결론을 내리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아무튼 앞으로도 이런 실력있는 코미디언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했듯이 코미디는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웃겨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톺아보고 그들을 칭찬하는 시간을 종종 가져서, 앞으로도 어려운 고민을 계속 해 나가도록 격려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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