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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28. 2020

가만한 이야기 2

HBO <나의 눈부신 친구>



내가 생각하는 픽션을 가장 잘못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한 마디로 압축되는 교훈 혹은 주제 의식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난 것처럼 자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주제 의식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로 픽션의 존재 의의를 평가하는 것 말이다.


개인마다 감상이 다른 것인데 왜 ‘잘못' 이해한다고 말하느냐고? 아예 용도가 틀린 사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손톱깎기를 가지고 종이를 자르겠다고 하면 그걸 본 사람은 옆에서 틀렸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픽션은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픽션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본인이 그 픽션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가치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어떤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했다면 애초에 평가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왓챠에 등록된 <나의 눈부신 친구> 시즌 1, 2에 대한  감상평들을 읽고 한 생각이다.


많은 감상평들이 레누가 짜증 난다, 릴라 같은 친구는 곁에 두어선 안된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혹은, 서로 간의 경쟁심을 통해 각자 발전하는 아름다운 우정이다 같은 말을 하거나. 그러니까 그들은 어느 쪽이든 한 마디로 <나의 눈부신 친구>가 친구 관계에 대해 교훈을 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엘레나 페렌테의 원작 “나폴리 4부작”을 토대로 한 이 드라마는 처음 몇 분간은 이태리어라고 구분조차 못할 정도로 독특한 나폴리 지역의 투박한 사투리를 그대로 구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남부 이태리의 찬란한 태양이 아닌, 무채색의 건조한 모래 바람이 몰아치고 폭력이 일상인 다세대 주택이 몰려 있는 동네에서 시작된다.


레누와 릴라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다면적인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이 픽션 속의 캐릭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짜증이 나서 싫다고 말할 때마다 흥미롭게 지켜본다. 왜? 저 캐릭터들은 누구보다 현실의 당신들을 닮아 있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래서 그렇게까지 싫은 걸까?


레누와 릴라는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기도 하다. 둘은 서로 너무 다른 성격으로 태어났지만 뛰어나게 똑똑한 여자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공부를 계속하도록 권유받았지만,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가정환경 때문에 두 사람의 진로는 극명하게 갈렸다. 하지만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고등교육까지 마친 레누도, 부모의 반대 때문에 공부를 일찌감치 그만두고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릴라도, 그렇게 서로 다른 공동체 환경에서 강요받는 같은 억압 때문에 서로에게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다른 환경에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견뎌야 하는 시련의 맥락은 같았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삶이라는 그 맥락 말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남자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해야 하고, 그러면서 지혜로워야 하고, 동시에 아름다워야 하고, 또 남자들에게 욕망(desire) 되어야 하고, 그다음엔 아이를 낳아야 하고, 하지만 남편의 돈만 축내면 안 되며 자신의 생활력이 있어야 하고,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며 모든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우리 은하계에 대통령이 생긴 대도 그보다는 할 일이 적을 것 같은 모순적이고 숨쉴틈 없이 촘촘한 그 압박 말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조혼인 결혼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야 했던 릴라는, 결혼식 전 자신도 곧 학업을 그만둘 것이라는 레누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 “레누, 넌 나의 눈부신 친구야. 꼭 모두 A를 받고 졸업하겠다고 약속해. 넌 누구보다도 똑똑해야 해, 남자들보다 더.”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한 선택 — 그것이 온전히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의 경과가 으레 그렇듯, 결혼의 시작과 함께 불행으로 치닫는 자신의 삶 속에서 고등학생 레누의 일상의 단편(선생님의 고급 아파트에 모여 이데올로기와 세계정세에 관해 토론하는 고등학생들)을 본 릴라는, 열등감과 질투심에 휩싸여 일부러 악의적으로 레누에게 상처를 주고자, 너희는 모두 껍데기만 흉내 내는 우스꽝스러운 루저들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해 말한다. “좋든 나쁘든 그래도 나에겐 남자가 있어.”


둘 중 어느 것이 릴라의 진심일까? 물론 둘 다 그녀의 진심이다. 레누가 누리는 것들을 간절히 원했던 릴라는 좌절된 자신의 꿈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애썼고, 그녀의 가족과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은 그런 그녀의 필요를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며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자기가 손 쓸 새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자신의 인생을 보는 릴라의 절망을, 그저 지켜보기 짜증 난다거나 못 됐다는 말로 정리해 버릴 수 있을까. 그래도 자신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여자로서의 성공(돈 많은 남자의 부인이 되는 것)을 성취했다고 스스로 합리화해야만 하는 그 쓰디쓴 마음이 정말 진실된 만족이겠는가.



하지만 레누 또한 이런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릴라가 결혼했을 때 그들은 겨우 17살이었다. 릴라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을 보며 레누는 자신이 어떤 남자에게도 욕망되지 않는 ‘쓸모없는' 여자가 되어 버릴까 두려움에 떤다. “모두가 릴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그 작은 조각을 얻어가려고 애쓸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해도 릴라가 가진 위대한 매력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 가장 동경하는 것을, 릴라는 남성들에게 원해지는 여성으로 태어난 천부적 능력으로 손쉽게 채 가 버린다고 생각한다. 전혀 사실이 아닌 명제들이지만 지금의 레누에게 중요한 것은 냉정한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실체 없는 매력에 대한 초조함 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엔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친구인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박탈감에 대한 사색과 열망을 원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 주변의 어떤 여자들도, 자신이 갖지 못한 다른 차원의 충족감에 대해 그들만큼 아쉬워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아무리 최선을 다 해 타협하고 순응해도 헐거워지지 않는 억압 속의 삶을, 계속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레누와 릴라의 세상은 다르다. 그들은 숨통을 죄어오는 억압들을 피하거나 반사해 내며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쉴 틈 없이 튕겨져 나간다.




HBO에서 제작된 <나의 눈부신 친구> 시리즈는 영상매체 연속극이라는 장편의 장점을 최대치까지 살린다. 모든 상황과 관계에 대한 심리 묘사를, 가능한 시청각 요소를 총동원 해 세밀하게 그려낸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뿐 아니라 의상, 배경, 화면 연출까지 모든 요소가 한 컷 한 컷 스무스한 앙상블로 이어진다. 이야기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것만큼 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에도 집중해야 하고, 그러데이션처럼 모노톤에서 점점 풍부해져 가는 화면 속 색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그렇게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막스 리히터의 음악이 시리즈 내내 돕는다.


그러니 이렇게 셀 수 없이 많고 작은 요소의 입자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성긴 체에 그냥 부어 버린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그냥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앞서 포스팅 한 ‘가만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픽션에 너무 가혹하고 자신에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 픽션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얼마나 훌륭한지 혹은 얼마나 별로인지 이야기하고 싶다면, 일단은 본인이 먼저 촘촘한 체를 준비해야 한다. 별점 매기기와 한 줄 평 쓰기는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평론가들이 하도록 놔둬도 된다. 일단은 걸러진 자신의 체 위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부터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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