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물건
새벽 다섯 시.
아이들이 또 굴러다녔나 보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의 자세를 고쳐주고 배에만 슬쩍 이불을 덮어준다. 살금살금 일어나 안방 문을 닫고 주방으로 향한다. 고요하다. 물 한잔을 마시고 스트레칭 겸 명상을 한다. 오늘은 커피를 마실까.
커피잔을 들고 냉장고와 식탁과 거실을 지나 어디론가 향한다. 유리문을 살짝 밀어젖히는 순간 내 눈 앞에 나를 바라보는 녀석이 있다. 기다랗고 반짝이는 녀석, 빨갛게 빛나는 고운 자태, 하얗고 미끈한 네 개의 다리, 그 다리를 받치는 동그란 회색의 발판. 어제도 오늘도 이 자리에서 든든하게 반겨주는 너.
신혼시절부터 함께 했던 우리의 식탁. 벌써 10년이 넘었다. 결혼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심 공간에 있었던 빨강이. 밥상이자 책상이었고, 때로는 탁자이거나 독서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음악이 흐르는 카페가 되기도 하며 멀티유즈가 무엇인지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식탁이라 불러야 할지 책상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식탁인들 어떻고 책상인들 어떠랴. 너는 그냥 빨강이 자체인데. 십여 년 전 겨우 만 원짜리 일곱 장과 맞바꾼 든든한 녀석이다. 남편이 온라인 몰에서 골라 다리 따로 상판 따로 배송되어 왔다. 가성비 최고의 아이템이라며 추켜세웠다.
아이가 한 명 태어나고, 또 한 명 태어나고 둘에서 셋으로, 이내 셋에서 넷으로 가족이 한 명씩 늘었다.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남편을 만나 투룸으로. 그리고 세 번째 집으로 오는 동안 우리가 점유하는 공간도 조금씩 넓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빨강이가 있는 공간이었다. 든든하게도 거실과 주방 사이를 오가며 제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사실 빨간 유리 상판과 하얀 철제 다리가 슬쩍 지겨워질 때면 유행을 타는 것 같아 한두 번쯤은 바꾸어 볼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여전히 새 것 같은 물건을 바꾸자니 제로 웨이스터로서의 사명감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무처럼 때가 타거나 마모되는 일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바꾸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도 혼자 이 자리를 차지하고부터인 것 같다. 빨강이가 온전히 내 차지가 된 지 이제 3년 차가 되어간다. 알파룸을 책 읽고 밥 먹는 공간으로 쓰다가 서재 겸 내 방으로 만들었다. 빨강이를 이 곳으로 들이고 자연스럽게 식탁 겸 책상 용도의 것 하나를 더 들였다. 새로 들어온 녀석은 진한 나무색에 까맣고 심플한 다리를 가지고 있다. 서로 물성도 색도 다른 매력을 풍긴다.
내 방이 생긴 뒤로는 이 공간을 중심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일상이 제대로 돌아간다. 책상 앞에 앉으면 등 뒤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고 앞에도 책이 놓여있다. 노랑, 초록, 빨강, 핑크 등 모아 놓으니 곱기도 하다. 다채로운 컬러로 나를 유혹하고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책상 끝으로는 랩탑을 올리고 선을 연결했다. 스탠드를 왼쪽에 자리잡고 커피잔이 올라갈 컵 받침도 놓았다. 스탠드에는 포스트잇으로 소망을 붙여놓고 랩탑 앞에는 노트와 책을 펼쳐둔다. 언제든 이 자리에 오면 바로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커피를 마시고 궁금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장소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없더라도 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늘 그렇듯 옷방이나 안방의 한 구석을 찾아 내 자리를 만들었겠지. 그렇지만 아이가 생긴 이후로 처음 생긴 내 방과 내 책상이 주는 안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방문을 닫고 이 곳에 앉아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편안하고 든든하다.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며 응원을 보내는 것 같다.
다시 새벽 다섯 시. 오늘도 안방 문을 살포시 닫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내 방으로 온다. 짧게 감사한 이야기를 쓰고 메모를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 책장을 열고 가만히 활자 사이로 가만히 들어가 여행을 한다. 오롯이 나의 시간, 나의 장소, 나의 책상과 함께 오늘도 나의 아침을 연다. 내일도 그랬으면.
@글 쓰는 별사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