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에서, 나는 이 노래를 다시 불렀다.
2022년 5월, 베를린으로 향하는 길에 더블린에 잠시 들렀다.
숙소 로비에서 마주한 조이스의 벽화가
나를 도시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오래된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You Raise Me Up>.
이 노래는
소박한 선율 위에
인간이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얹는다.
고통, 침묵,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순간들.
그 땅의 역사와 풍경 앞에서
멜로디는 더 낮고 깊게 가라앉았다.
십여 년 전 크리스마스,
후원하던 복지시설에서
노래 한 곡을 부탁받았다.
입소자들의 작은 무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망설이다가 고른 노래가
바로 이 곡이었다.
불러본 적은 없었지만
멜로디는 이미 몸에 들어와 있었다.
웨스트라이프의 음성을 빌려 연습했고,
무대는 무사히 끝났다.
그날 이후 이 노래는
‘잘 불렀던 곡’이 아니라
‘다시 부르게 되는 곡’이 되었다.
<You Raise Me Up>은 시크릿 가든의 음악이다.
노르웨이의 롤프 뢰블란과
아일랜드의 파눌라 셰리가 만든 이 듀오는
<Nocturne>로 유로비전의 정상에 섰다.
이 곡 역시
북아일랜드 민요 Londonderry Air의
바탕 위에 놓였다.
브렌단 그레이엄의 가사는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을 말한다.
아일랜드는 기억의 땅이다.
1840년대 대기근은
백만 명을 굶겨 죽였다.
쥐들이 시신을 파먹던 시절,
사람들은 땅도, 언어도,
존엄도 빼앗겼다.
그 역사를 떠올리자
외세에 짓밟힌 민초의 삶 위로
삼별초 항쟁의 고려 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지나온 조선,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시간이 겹쳐졌다.
고통은 늘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복되었고,
견뎌졌으며,
기억으로 남았다.
그렇게 겹쳐진 기억들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 일어서기엔
조금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렌던 그레이엄은
소설 『The Whitest Flower』에서처럼,
참혹한 역사 속에서도
인간의 사랑과 이성으로
고난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중심적 범신론.
그 사유는
시크릿 가든의 음악 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 음악은
구원보다
동행에 가까웠다.
2022년 5월 12일,
더블린 공항에 내리자
게일어 표지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많이 쓰이지 않는 언어.
그러나 사라지지 않으려는
의지의 흔적이었다.
리피강은
도심을 가르며 흘렀다.
하페니 브리지 위에 서자
바람이 세게 불었다.
강물 위로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굶주림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던 시간들.
그 순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가 우울하고 내 영혼이 지쳐갈 때...”
더블린의 리피강변
바람은 선율을 실어 나르고
강물은 그 소리를
오래 붙잡았다.
이 노래는
위로가 아니라
증언처럼 들렸다.
아일랜드는
이제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도심 한편에
대기근 기념관을 남겨두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회복은
망각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해 질 무렵,
템플바의 펍에는
음악이 흘렀다.
기네스의 거품,
오래된 나무 향,
벽에 걸린 포스터들.
이곳에서 음악은
오락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며
다시 조이스의 벽화를 보았다.
조이스가
문장으로
인간의 의식을 파고들었다면,
<You Raise Me Up>은
멜로디로
그 바닥을 건드린다.
리피강 위에서
불렀던 그 노래를
떠올리며
나는 알게 되었다.
회복이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손길,
그리고
그 손길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