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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pr 11. 2023

텅 빈 여자 (2)

당신이 옳다




봄 비가 달다.

내 안에 있던 먹구름이 밖으로 나간 걸까. 요 근래 불쑥 찾아온 우울함에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보니 한결 나은 느낌이다.



어제 친한 친구와 사소한 균열이 있을 뻔했다.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 한다.

친구 A, 친구 B, 나. 이렇게 셋은 오랜 친구이다. 내 삶 속에 가장 깊게 침투해 있는 기억들은 대부분 그녀들과 함께 만든 기억이다.

친구 B는 지난 몇 년간 일년에 두 차례만 열리는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 이유로 원체 연락을 잘하지도, 받지도 않는 친구이기에 나랑 친구 A도 시험을 앞둔 그녀에게 최근엔 연락을 잘하지 않았다. 나도 시험일이 돼서야 응원 문자를 하나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제인아, 나 문제가 있어.'



분명 지금은 시험을 응시하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답장이 오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일단 전화를 걸었다.

친구 B는 이전부터 시험운이 없는 편이었다. 이번 시험도 여러 가지의 사소한 불운들이 섞여 그녀에게 찾아왔고, 몸집을 불려 기회를 앗아갔다.

나는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살았기에 급하게 만나자며 점심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B를 만나 점심을 사주고 커피 한 잔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괜찮아. 다음 시험이 있으니까.

커피는 잘 식지 않았고,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카페에 앉아 시험 이야기뿐만 아니라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 B는 나의 오랜 심리상담사였다. 나는 타인에게 힘듦을 곧잘 털어놓기도 하지만 유독 그녀와 이야기하면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나누다 나 또한 다음날 이직 시험이 있었기에 일찍 헤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친구 A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B 시험 끝났어?'

이미 서로가 연락을 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당황하면서 나는 그렇다고. 어제 친구 B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 A는 서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둘 다 왜 나한텐 연락을 안 해줘? 나도 시험 끝나길 기다렸는데. '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A가 단톡방에 긴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좀 억울한 기분이었다. 시험 일자도 몰랐으면서, 나는 시험임을 알고 연락을 하다 답장을 받았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맞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친구 A에게 통화를 걸었다.



친구 A는 우리 중 가장 털털한 친구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는 좀 달랐다. 나랑 친구 B가 둘이 만난다 할 때도 이를 본인한테 말하지 않으면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누군가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셋이 만나길 바랐고 만약 그런 상황이라도 말을 해주길 원했다.



우리의 균열은 그 지점에서 자주 찾아왔는데, 나는 나이가 들며 굳이 그걸 다 이야기해야 하냐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에도 이해가 잘 되지 않다 보니 마냥 미안하다고 이야기가 나오질 않아 전화를 걸었고, 친구 A가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한참을 서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우선 A에게 네가 B의 시험 일정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혹은 B가 이야기를 했을 줄 알았다고. 우리가 먼저 둘이 만난 건 갑자기 문제가 있다고 답장이 온 B 때문에 내가 놀라서 나간 것이다. 라고 말했다.



 A는 본인도 B의 시험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둘이 만났을 때 본인의 생각은 안 했냐고 서운해했다. 실제로 시험 끝나고 같이 만나는 날을 고대했던 A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먼저 일일이 이야기를 해야 했나? 답답함이 밀려왔다. 한참을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던 와중 A가 툭 이야기했다.



'근데 내가 왜 서운한지 알잖아...'

 그리고 나는 무너졌다. 맞아. 사실 이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때 A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본인을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는 거, 상황이 그랬을 뿐 당연히 우리의 관계에서 똑같이 본인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친구 B는 나와 공감의 주파수가 비슷한 사람이었고 나에겐 약간 아픈 손가락 같은 친구여서, 나는 B에게 마음을 쏟을 때가 있었다. A는 워낙 털털한 편이니 괜찮겠지 치부하며. 어쩌면 그렇게 쌓여왔던 것일 수도 있겠다.



A의 한마디를 듣고 나니 앞서 내가 팩트는 이거라며 대응했던 이야기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래, A의 말에 일일이 반박할 게 아니라 그냥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해 줬으면 되는 건데. 나는 그제야 네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님을. B와 만나서도 너의 이야기를 계속했고, B의 일상이 안정을 찾아 셋이 만나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하고 바라었음을. 너도 B도 모두 나에겐 너무 소중한 존재임을. 몇 번이고 설명했다. 그제야 A의 목소리가 좀 가벼워졌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책 '당신이 옳다'는 내가 몇 번이고 주변인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진정한 공감법을 알게 되었고, 위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누군가에게 공감함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말에서 밀리는 걸 싫어하는 내 성격은 매번 타인이 틀리고 내가 옳은 것임을 증명하려고만 애썼다.

당신이 옳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언이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 뜻이다.

그래. 친구 A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너의 감정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친구의 감정을 긍정하자 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 하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오해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옛날이었으면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며 타박을 줬을 테지만, 이제는 안다. 친구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였음을.



앞으로도 나의 인간관계에서 몇 번이고 이런 상황들이 찾아오겠지. 그럴 때마다 피곤하다며 상황을 넘기기에만 급급한 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공감하며, 조금 더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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