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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9. 2023

은희의 말들

여름이 되면 우리 바다에 가자

은희는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했다. 가령 물 표면이 햇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윤슬을 볼 때면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뿌려놓은 것 같다고 황홀해했다. 그리곤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은 여름이 되면 사람이 많이 없는 바닷가에 가자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 당시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말갛게 웃는 은희의 얼굴이 윤슬처럼 빛나 눈을 찌푸리며 웃었던 것 같다.


8월의 한 낮. 사람이라곤 찾아보기도 힘든 외딴 바닷가에서 나는 그제야 은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위를 질색하는 내가 한 여름에, 그것도 가장 더운 시간에 바다에 오다니. 분명 친구들이 들었으면 네가? 하며 되물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름만 되면 반쯤 죽은 시체가 되곤 했다. 추운 건 용납해도 더운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냥 오늘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 은희의 지나간 말이 뇌리를 스쳐 운전대를 잡았다. 항상 알 수 없는 말만 했던 은희의 말을 오늘은 제대로 이해해 보고 싶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사람도 이젠 없기 때문에. 그렇게 바다에 왔다.

모래사장 가운데 서자 작렬하는 태양이 온몸을 꿰뚫었다. 엑스레이를 찍는 마냥 몸속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투명하게 비쳐 보일 것 같았다. 눈을 뜰 수도 없이 밝은 빛으로 나를 관통하는 태양에 의해 정말로 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득해지는 정신과 더불어 이상하게 속에서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꾸물거렸다. 유달리 피부가 하얗고 투명한 은희였다면 정말 부서졌을지도 모르리라.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갔다. 힘겹게 눈을 뜨자 잔잔한 파도 사이로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조각 사이사이로 환하게 웃는 은희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듯도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도 너처럼 반짝여 보일까?


더위에 맞서느라 온 힘을 다 써버려서 축 늘어진 몸으로 차로 돌아가 에어컨을 틀었다. 룸미러에 갑자기 등장한 빨갛게 익은 얼굴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러자 은희가 속삭였다. 내 말이 맞지? 웃음이 가득 묻어 나오는 질문에 나 또한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너 말이 맞네. 은희가 두고 간 말들은 거짓인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아주 얇은 막을 가진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을 세밀하게 느꼈고, 자신이 느낀 바들을 특유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자신을 온몸이 무색 투명한 보름달물해파리 같다고 표현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은희를 제법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그 덕에 나는 자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에서 헤엄쳐야 했지만, 재잘대는 은희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말에 이해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의 섭리처럼 납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곁에 없는 그녀의 말이 문득 떠오르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잡게 된다. 은희의 언어를 몸소 느껴보고 싶어서.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너의 선택을 다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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