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 삼아 만든 카카오프렌즈 인형, 캐릭터 비즈니스의 불씨가 되다
2012년 초겨울, 카카오프렌즈는 한국 이용자들의 채팅창에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대다수 국민이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네트워크 효과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노출됐기 때문이다. 약간의 결핍을 안고 태어난 캐릭터들은 금세 친숙해졌고 호감을 샀다. 카카오 크리에이티브 랩(Creative Lab)은 ‘Next Something’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바일에서만 만나던 카카오프렌즈를 오프라인에서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직접 만지고 느끼면서 캐릭터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카카오와 더 친숙해지겠지?’, ‘IT회사라고 캐릭터 비즈니스를 못할 건 뭐야?’와 같은 다양한 생각들이 오갔다.
구성원 대다수가 모바일과 디지털에 집중하던 카카오였기에, 이런 구상은 회사 내에서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주로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크리에이티브 랩 안에서도 관련 비즈니스를 경험해 본 크루는 아무도 없었다. 금융 회사에서 마케팅을 하다가 이직해 온 켈런(Kellan)이 담당자로 지목됐다. 고객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해 본 경험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캐릭터 굿즈를 직접 제작하고, 판매까지 하는 건 종전에 경험한 마케팅 일과는 결이 전혀 달랐기에 부담스러웠어요. 세 번 정도 제안을 고사하다가, 강한 독려에 결국 담당자가 됐습니다. 2013년 가을, 저와 디자이너 세 명이 업무를 맡았어요”. 켈런의 기억이다.
앞서 카카오프렌즈 중 네 친구들이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통해 한정판 형식으로 몇 차례 완판을 기록했고, 온라인 중고장터에서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곤 했다. 다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Next Something’ 이 오프라인 캐릭터 스토어로 정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매장을 여는데 다른 차원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 까진 누구도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이용자들이 프렌즈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확인됐지만, 카카오 내에서 캐릭터 스토어 오픈은 여전히 ‘중요한 일’에 끼지 못했다. 켈런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카카오톡과 카카오스토리, 카카오 게임하기 등 모바일 플랫폼 서비스 여럿이 엄청난 트래픽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였어요. 제조와 유통이라는 영역에서 다들 경험이 없었고, 잘 된다 하더라도 주력 사업인 모바일에서의 성공만큼 가치 있겠느냐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팝업 스토어 오픈을 위한 준비는 2013년 말부터 진행됐다. 하지만 어디에 열 것인지, 어떤 파트너사를 섭외해야 하는지, 초도 물량은 얼마나 갖춰야 하는지 등 세부적인 밑그림은 거의 없었다. 때마침 카카오프렌즈의 행보를 눈여겨보고 있던 현대백화점 측과 뜻이 맞았다. 봄날 신촌점 지하에서 60종의 굿즈를 선보인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겨우내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카카오 크루들과 파트너사 관계자들은 스토어 오픈을 준비했다. 캐릭터 비즈니스 전문가들이 사내에 즐비한 지금이라면 일사천리였겠지만, 당시엔 필드 노하우가 빈약해 요소요소에서 애를 먹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백화점 문을 닫은 뒤 기존 매장을 철거하고 작업을 해 나가는 수순이나, 제품을 실은 화물차들이 도착했을 때 하차 인력을 별도로 배치하는 불문율 같은 것들을 때마다 몸으로 겪어야 했던 것.
하차 인력을 따로 꾸리지 않았던 크루들은 오픈날 새벽 내내 신촌 현대백화점 안팎을 오가며 제품을 날랐다. 아침이 밝아오면서 팝업스토어 근처 백화점 출입문에 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켈런이 회상했다.
“유명 브랜드에서 세일을 하거나 다른 행사가 있는 줄 알았어요. 우리 중 누구도 카카오프렌즈 때문에 고객들이 미리 와서 기다릴 거라고 상상을 못 한 거죠. 어쩐 일로 이렇게 줄을 선 건지 궁금해서 여쭤봤더니, 모두 카카오프렌즈 팝업에 온 거라고 했어요. 새벽 KTX를 타고 상경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팝업 운영 기간인 2주 동안 한 번이라도 계산대에 줄 선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KPI였는데, 잘못짚은 거였죠. 내부의 누구도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어요”.
백화점 문이 열림과 동시에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칫 사고라도 날까 봐 긴급히 안전요원을 배치해야 했고, 에스컬레이터 가동도 일시 중단됐다. 캐릭터 경험에 맞춰 설계한 동선은 무용지물이 됐고, 빈 매대를 채우기 위해 박스를 뜯는 순간 고객들의 손이 더 빠르게 제품을 낚아채 갔다. 현장에 고용된 아르바이트생들과 담당 크루들 모두 2주 동안 “화장실 한번 제대로 가기 힘들 정도로” 진땀 빠지는 시간이 지나갔다. 신촌의 봄에 카카오프렌즈 꽃이 활짝 피었다.
인파에 떠밀리듯 신촌 매장은 막을 내렸다. 서울 목동과 무역센터, 부산, 대구, 전주 등 전국을 돌며 이어진 팝업 스토어 덕택에 담당자들은 그 해 내내 출장길에 올라야 했다.
신촌 이후로 1년 간 팝업 스토어 열 곳에 더해 정규 매장도 다섯 곳이 문을 열었다. 폭발적인 인기에 제품 라인업을 늘려야 했다. 그 와중에 각종 생필품 브랜드들과 협업 라이선스 계약이 이어졌고, 전문가들이 충원됐다. 카카오 내 작은 TF였던 조직은 파트로 승격됐고, 이는 카카오프렌즈만의 독립적인 사업을 전개하는 원동력이 됐다.
카카오톡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그리고 카카오프렌즈의 세계관과 별개로 사람들은 자신 혹은 지인의 모습을 프렌즈 굿즈에 투영하거나 위안을 얻는다. 미취학 아동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손잡고 스토어를 방문해 공감대를 형성하게 돕는 것도 카카오프렌즈가 가진 힘이다. 무엇보다 카카오라는 기업 집단에 친근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심어준 핵심 요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카카오프렌즈가 실물로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나라 캐릭터 제품 시장은 아동용 혹은 외산 캐릭터 둘 중 하나였어요. 어른들도 어색함 없이 생활 속에 두고 쓰게 된 국산 캐릭터 굿즈는 카카오프렌즈가 처음이었습니다. 여러 기업들이 기업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방법이자 비즈니스 모델로 캐릭터 굿즈를 바라보게 한 계기도 되었고요. 한국 캐릭터 시장의 흐름을 바꾼 일원이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집니다” _ 켈런
이제는 미국과 일본, 대만과 중국 등 해외 행보에도 여념 없는 카카오프렌즈. 독특한 태생의 이 동글동글한 친구들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