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제에 도전할 때 의도적으로 냉철 해저야 하는 이유
사회혁신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화를 할 때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사회'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그런지 사회적 기업이나 소셜 벤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사실 그 “착한 마음"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사회를 따듯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순수하고 나약한 사람들이나 관심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얕잡아 보기 위한 단어 선택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얼마 전부터 ESG라는 단어가 주식 투자에서 까지 키워드로 등장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친숙한 개념이 된 것 같다.
대학교 입학 직후 1학년 1학기에 우연히 ‘사회적 기업가정신'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육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말을 하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해왔는데, 그때 경험에서 감각적으로 알게 된 것이 어느 쪽에서는 학문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웠다.
나 조차도 봉사하는 마음에 사회적 기업을 바라보았으나,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메모한 것을 보며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인류라면 당연히 느끼는 니즈를 해결하는 것은 공감이 따로 필요 없다. 그 문제는 이미 모두가 문제라고 알고 있고, 누군가 이미 나서서 해결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는 실존하는 문제지만 아직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또는 해결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당연한 현상으로 인식되기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어야 사회적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다.
특정 문제를 인식한 것은 좋지만, 그것이 실제 문제인지 파악하는 단계가 무조건 있어야 한다. 공감이 단순히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반대로 내가 직접 겪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했다면, 실제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지 냉철히 파악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공감한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진짜 사회적 문제라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을 지향하면 단순히 현실을 모르는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굶지 않는 세상
모두가 세상의 기본적인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집을 가진 세상
…
정의로운 세상
무슨 생각이 드는가? 말만 좋을 뿐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마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꿈꾸며 지금까지 수많은 시도를 해왔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실패한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을 역사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동정심 가질 만한 것을 보면 의심한다. 그것이 설령 진짜 문제임에도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꼭 풀어야 하는 전 인류적인 문제지만, 너무 감정을 경계한 나머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의 공감은 감성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진짜 문제라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이성적인 증거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납득 가능한 것으로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문제 상황 하나를 예로 들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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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아이들이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다. 아이에게 왜 친구들과 나가서 놀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이전에는 놀이터나 모래사장이 충분했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며 아이들이 진정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고 아이들이 집에서 스마트폰이나 붙잡고 있는 것을 보며 아이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이 아이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놀이터를 늘려주는 사회적 단체를 만들어 후원을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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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보게 되면 감성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그게 진짜 문제인지 의심이 들게 된다.
‘놀이터를 설치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 얼만데 그 돈으로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놀이터가 꼭 있어야 해? 아이들이 놀공 간이 없어졌지만 다치는 확률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혹은, ‘실내에서 다른 활동을 하며 인류적으로 발전한 것 아닐까?’ 하는 합리화까지 이어질 수 있다.
단순히 아이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놀이터를 늘려야 한다는 감정에 충실한 주장으로는 문제가 진정 해결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놀이터가 없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한다면 그 사회적 증거가 있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놀이터가 있는 곳의 아이들의 성장과 놀 공간이 없었던 아이들의 성장을 정량적, 정성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면?
그 차이가 확실히 유의미하다면 어떨까? 놀이터가 없는 곳의 아이들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얼마나 더 큰 비용이 드는지 계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직접적이고 재무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받는 이해관계자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돈을 투자해서라도 ‘놀이터 없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는 경제적으로 설명 가능하고 정책적으로 해결할 동기가 생기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비즈니스 적으로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나가서 뛰놀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다는 단순한 문제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놀이터를 늘려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례에서 사회적 문제를 볼 때 편견을 버리고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배웠다. 단순히 착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배우고 더 똑똑하게 고민해야 하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회적 문제 해결은 물렁한 목표가 아니다. 더 냉철하고 똑똑한 생각으로 바라보아야 진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