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긴 하루의 끝

휴가 좀 다녀올게

by maybe



17시 15분, 어찌어찌 호텔에 도착했다. 얼굴과 몸에는 이미 땀으로 범벅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걸었으니 얼른 내려놓고 싶었다. 카운터에 있던 안경을 쓴 여성은 벌떡 일어나 내게 인사를 했다. 20대 초반 정도로 어려 보였다. 오른쪽 팔에는 'Everything happens without reason.'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여권을 건네며 뭐라고 말했는데, 이미 지친 상태에서 주의 깊게 듣지 못했고, '블랙핑크'라는 말만 들었다. 그에게 물었다. "'깜언'은 어떻게 발음해?" 그가 "'Thank you' 말하는 거야?"라고 되물었다. "응, 너희 말로 'Thank you' 이거 어떻게 말해?"라고 대답하며 다시 물었다. "깸언" 정도로 들렸다. 나도 따라 말했다. 몇 번 더 말해주면서 그가 카드키를 건네준다. "굿, 퍼펙트"라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어색했지만, "깸언!"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씬짜오?' 이건 어떻게 발음해?" 그가 다시 되묻는다. "'Hello'를 말하는 거지?" "예아, 헬로우. 유어 랭귀지." 그가 웃으며 "씬-짜오" 한다. 나도 "씬짜오" 따라 말한다. 이건 성조가 없는 건가? 아무튼. 그를 보면서 "깸언!"을 외치며 돌아섰다.


17시 20분, 방에 들어와 카드키를 꽂았다. 102호였다. 창가에 배낭을 던져놓고 짐을 풀고 땀에 젖은 옷을 벗었다.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시내로 나가 구경해야지. 배낭 메고 좀 걷지 뭐. 가볍게 생각했던 어제의 나야, 깊게 반성해라.


17시 57분, 슬슬 뭐 좀 먹어야 할 텐데. 구글맵에서 식당을 검색해 봤다. 대다수의 식당이 모두 없어진 듯했다. '영업 중'으로 필터링을 했다.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호텔 바로 옆에 평이 좋은 몇 군데가 있었다. 별 4.9 식당은 곧 영업 종료, 18시 마감. 그 옆에 있는 식당의 최근 리뷰는 "2022년부터 매장에서 못 먹어. 무조건 포장이야."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먹고 싶었기 때문에 여기도 패스. 대략 반미와 쌀국수를 파는 곳을 점찍어 두고 호텔을 나왔다. 구글맵의 안내대로 걸어왔으나 그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가 맞은편에 현지인들이 식사하고 있는 쌀국숫집을 발견했다. 내가 들어서자 10대로 보이는 어린 남자애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로 "여기서 식사할 수 있어?" 물어보니,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바로 앞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흔한 영어 표기와 사진조차 없다.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사진으로 찍어 구글 번역을 해봤으나 소리만 표기한 것으로 번역이 엉터리였다. 나를 앉힌 아이가 다시 다가왔다. 내가 메뉴판 첫 번째를 가리키며, "저거 1인분"을 말했는데, 그는 메뉴판과 내 손가락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저 첫 번째 메뉴는 뭘까? 파파고로도 번역을 시도했지만,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나오겠지. 못 먹을 음식도 아닐 테고. 고개를 돌려 식당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의 중년 여성, 뒤쪽 테이블의 젊은 여성 둘, 맞은편 테이블에도 젊음 여성 둘, 아이 하나, 내가 앉은 테이블 라인 끝 쪽에는 어려 보이는 남자애들 여섯이 앉아 있었다. 가지고 간 물을 마시는데, 갑자기 저쪽 테이블 남자애들 무리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뭐라고 외쳤다. 베트남어도 중국어처럼 성조가 있는 데다가 큰 소리로 뭐라고 하는데, 이 식당에서 나 혼자만 깜짝 놀란 눈치다. 내게 주문을 받았던 아이가 달려가 그 옆의 빈 테이블 위에 있던 그릇들을 치우고 행주로 닦았다. 뭐야, 옆 테이블 치워달라는 거였나. 그렇다기에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다시 물을 들이켰다. 아마 나는 소리 지른 남자애가 한 말의 의미를 영영 모를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찰나 주문받은 아이가 국수 한 그릇과 숙주가 담긴 접시를 내 앞에 갖다 둔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고, 준비되어 있는 라임 한 조각을 집어 즙을 짰다. 주문받은 아이는 계속 신기하다는 듯이 나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숙주를 국물에 담그며 국물을 떠먹었다. 맛있다. 혼잣말을 하며 국수 위에 얹어진 고기를 뒤적였다. 거의 생고기였다. 고기를 국물에 담그고 면발을 먹기 시작했다. 나를 지켜보던 아이는 이내 또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빈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면발을 거의 다 먹을 즘 고기가 좀 익은 것 같았지만, 씹어보니 설익어서 질겼다. 아마 내가 시킨 메뉴는, 혹은 아이가 알았다고 했던 메뉴는 고기였나 보다. 거스름돈을 받아 들고 나오는데, 매장에 앉아있던 모든 현지인들이 나가는 나를 쳐다봤다.


19시 22분, 미니스톱 편의점에 들러 주전부리를 샀다. 심심한 쌀국수 한 그릇에 아직 헛헛한 느낌이 들어서. 민초 아이스크림과 미니 오레오, 초코바, 요거트를 샀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가 멀어서 걸었다. 그러다 반미를 발견한 것이다. 길을 반쯤 건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반미를 주문했다. 내일 아침에 먹고 나가야지. 괜스레 마음이 신났다. 호찌민에서 아침식사로 먹는 반미. 그들도 아침에 반미를 먹겠지. 그들의 일상과 비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침을 먹자마자 공항으로, 공항에서 발리로 떠나겠지만.


20시,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잠시 눕는다는 것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요 며칠 새 가장 달게 잔 것 같다. 혹시 몰라 맞춰둔 알람 소리에 잠시 깼지만, 도무지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에잉, 그냥 좀 더 자자. 한 시간 남짓 더 잤다. 그러고 나니 컨디션이 제법 올라왔다.


22시 15분, 겨우 일기를 쓴다. 매일 챌린지 하던 게 있어서 인증으로 올렸는데, 생각해보니 한국은 이미 자정을 넘겼다. 220일 동안 연속 챌린지 성공이었는데, 시차로 인해 221일째 실패. 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쨌든 나는 휴가를 왔고, 지금 베트남에 있다. 풀어놨던 짐을 다시 정리해서 패킹했다. 짐이 늘어난 건 아닌데, 넣었던 순서나 방법이 달라졌는지 미묘하게 잘 안 들어간다.


23시 30분, 비엣젯 항공 홈페이지에서 수하물 15kg과 퀵패스 이용권을 추가 결제했다. 공항 현장 결제보다 훨씬 싸다. 330K+140K동을 결제하고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오늘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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