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와인
와인을 처음 마시게 됐던 날을 기억한다. 영화 <몽상가들>을 보면서 와인을 참 맛있게 먹는다는 생각을 했다. 배경은 60년대였지만 그들의 나이는 당시 나와 비슷했으므로 더욱 이끌렸던 걸까. 와인을 병째로 들고 다니면서 ‘병나발’로 마시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와인은 병째로 나발을 불어야 맛있다(?)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마트에서 제법 저렴한 레드와인을 사서 병나발을 불어 보았다. 술을 잘 마시지 않았던 내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처음 병에 입을 대고 와인을 들이켰을 때 약간의 쾌감이 있었다. 쌉쌀한 맛과 과실주 특유의 단맛이 느껴지면서 ‘소주보다는 맛있다’고 생각했다. 와인의 맛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취해버려서 다음날 숙취로 인한 두통으로 꽤 고생을 했던 것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와인을 자주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와인의 맛을 느끼기 위해 잔을 사기는 했지만, ‘와인은 병나발’이라는 엉뚱하면서 다소 괴팍한 철학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병에 입을 대고 마시다가, 머그컵에 따라 마시다가, 와인 전용잔을 사서 마시게 된 나름의 역사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음주 생활은 영화로 배웠다. 연애를 책이나 만화책으로 배우는 것처럼. 어릴 때 유행했던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도 있었는데, 그 만화로 와인을 배웠다면 아마 평생 와인의 맛은 모르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술도, 취하는 것도 싫지만, 와인과 맥주는 좋았다. 가끔은 목욕재계를 마치고 당장이라도 잠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홀로 와인을 마셨다. 어디선가 본 건 있어서 (아마도 어떤 영화에서 봤겠지) 재즈를 켜두고 조명을 어둡게 해두고 혼자 몇 모금 마시면 어느새 잠이 소로로 왔다. 마트에서 와인 구경 하는 것도 나의 숨겨진 취미였는데, 라벨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번 다른 와인을 선택해서 마셔보고 취향의 와인을 찾는 것도 꽤 즐거웠고, 이후로 주변에 와인 선물을 자주 했다. 오늘 오랜만에 만난 지인으로부터 와인을 보면 내가 생각난다고, 이제는 본인도 가끔 와인을 마시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의 어떠한 취향이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피드백은 역시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얕고 넓게 마시고 자주 경험했던 나의 와인 생활은 절친에게로 넘어가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 한다). ‘소주파’였던 그가 나와 어울리며 종종 와인을 한 잔씩 마시기 시작하여 30대 초반에는 직접 만들고, 소믈리에 과정을 듣고, 지금은 애인과 함께 깊게 와인의 세계를 탐미하고 있다. 내 생애 가장 소중했던 선물은 그가 처음 만든 와인이고, 가장 행복했던 선물은 내 생일에 직접 담가 만들었던 딸기 와인이다. 아직도 그는 가끔 내게 와인을 추천하며 선물한다. 그러고 보니 와인은 아직도 내게 큰 영향을 준다.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말 나온 김에 와인 한 병 까서 오랜만에 몽상가들이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