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각색 버전
탁 트인 바다 전망과 포도밭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마을 베즈(Bèze)에는 시렌이라는 18살 소녀가 나무꾼 일을 하며 숲 속 오두막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나무를 하다 숲 속 작은 야생동물들과 도시락을 나눠먹기도 하고, 심심하면 풀잎을 뜯어 피리도 불곤 하면서 평화롭게 살던 시렌에게 갑자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절대 미각을 깨워준다는 열매를 찾아 나무를 오르다가 떨어져 다친 수도승 까미를 구해준 날 이후로, 시렌의 머릿속에서는 온통 까미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까미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와인색 물방울 같이 생긴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절대 미각이 생긴다고 했어…. 궁에 납품할 최고의 와인을 내년까지 만들지 못하면 수도원에서 쫓겨난다는데… 와인 만드는 걸 도와주고 싶다. 아니 그냥 매일 까미 옆에 있고 싶어…그 열매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걸까…
시렌의 혼잣말을 엿듣기라도 한 듯, 갑자기 땅바닥에 글씨가 저절로 써지기 시작했습니다. <궁극의 미각을 원하는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붓을 들고 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시렌은 놀라 소리쳤습니다. "이게 뭐야! 누구시죠? 누가 장난하는 거죠?"
다시 바닥에 글씨가 써졌습니다. <나는 숲 속의 정령이다. 미각을 깨워줄 나무 열매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시렌은 무릎을 꿇고 외쳤습니다. "그 열매를 어떻게 구할 수 있나요?"
바닥의 글씨는 다시 이어졌습니다. <인간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우리 같은 정령의 보호를 받는 열매이지.>
시렌이 대답했습니다. "열매만 주신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다시 글씨가 나타났습니다. <네 목소리를 내게 바쳐라. 그러면 열매를 네 손에 쥐어주지.>
여자치고 약간 굵직한 목소리가 어차피 마음에 안 들었던 시렌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살던 터라 딱히 말동무도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못 해도 까미와 매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 열매를 먹으면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나요?" 확인 차 시렌이 물었습니다.
바닥의 글씨가 이어졌습니다. <그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와인을 만들 수 있지.>
시렌은 까미를 떠올렸습니다.
마른 듯한 어깨에서 유려하게 이어지는 목선과 귀 아래로는 살짝 각이 진 듯한 턱선… "시렌, 예쁜 이름이군요. 곧 또 만나요." 시렌이 구해주던 날 청량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던 까미..
까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보고 싶어진 시렌이 외쳤습니다.
"좋아요. 제 목소리와 열매를 맞바꾸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떴습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300년 묵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묻힌 항아리를 찾아서, 입구에 대고 노래를 불러라. 어떤 노래든 상관없다. 노래를 마치면 네 손에 그 열매가 쥐어져 있을 것이다.>
와인색 물방울 열매를 손에 쥐자마자 입에 털어 넣은 시렌은 수도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치 뭔가 목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시렌은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며 와인 양조를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 뒤, 완성된 와인 맛을 본 까미는 시렌의 두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드디어! 시렌 네 덕분에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어.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목소리를 잃은 시렌의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고 까미가 말을 이었습니다.
"최고의 와인을 만드는 사람을 부마로 삼는다는 왕의 약조가 있었거든. 이 와인은 정말 신의 경지야. 이제 드디어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어!"
수도승인 까미가 그저 최고의 와인을 만드려는가보다 생각했던 시렌은 큰 충격에 빠졌고, 그 길로 발을 돌려 혼자 살던 오두막에 돌아왔습니다. 소리 없이 흐느껴 우는 시렌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렌에게 나무 열매를 내어준 숲 속의 정령이 시렌의 목소리로 말을 건넨 것입니다.
"저 까미라는 놈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만, 인간사에 크게 관여해서는 안 되다 보니 귀띔해줄 수가 없었단다. 자 이 와인 오프너로 까미의 목을 그으면, 까미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 와인 맛이 아무리 좋더라도, 자기 딸을 벙어리와 결혼시키려는 왕은 없을 것이다. 목소리를 잃은 까미는 너와 함께 수도원에서 평생 와인을 만들며 살아가겠지. 어떠냐? 네가 원하던 것이 아니더냐?"
정령에게서 와인 오프너를 받아 들고 수도원으로 돌아간 시렌은, 잠든 까미를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공주와 결혼해서 네가 더 행복하다면, 너를 억지로 내 옆에 붙잡아 두지 않을게. 둘이 행복하길 바라.'
차마 사랑하는 까미를 벙어리로 만들 수 없었던 시렌은, 정령이 건네 준 와인 오프너로 자신의 목을 대신 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시렌이 삼켰던 물방울 열매가 목을 보호해준 동시에, 원래 굵직하기만 하던 시렌의 목소리 대신 훨씬 듣기 좋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절대 미각을 소유하여 이 세상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렌은 와인 신으로 등극하여, 와인 양조 비법을 원하는 와이너리에 컨설팅을 해주고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까미 못지않은 미소년을 여럿 정인으로 두고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시렌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최고의 와인을 만들지 못하는 까미는, 공주와 결혼은커녕 수도원 뒷방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일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