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은 내가 스스로 정의해 나가는 것.
"대팔아. 사람들이 정의하는 행복은 다 달라. 그렇지?"
"그렇죠. 누구는 정말 번지르르한 집에 살면서 노후 걱정없이 돈에 깔려죽는게 행복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정말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살면서 시쳇말로 덕업일치를 이루고 사는 사람도 있고, 또 누군가는.."
"어 중간에 말 끊어서 미안한데 대팔아."
영범은 대팔의 말을 자르고는 맥주잔을 부딪힌 다음 한 잔 꿀꺽 마셨다.
"투 모어 비어 플리즈"
"아니, 형은 여기 산지 5년이 넘었으면서 태국어 안쓰고 영어 쓰세요?"
"얌마, 그때그때마다 편한거 쓰면 되는거야."
영범은 대팔과 맥주잔을 짠하면서 한 모금 벌컥벌컥 마신 다음 안주를 집어먹으면서 질겅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영범의 말 사이사이로, 치앙마이의 밤공기엔 맥주의 향과 먼 나라의 시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대팔은 그 향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삶의 속도를 늦춰도 괜찮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행복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안정감을 느끼지."
"안정감을 느낀다라.."
"나라고 여기서 365일이 늘 행복하겠냐. 처음에 게스트하우스 장사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좀 오게 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고, 나름 자리를 잡아서 매일이 Full Room 이 되고 그러니까 이건 또 내가 생각했던 여유가 안생기고 그랬지. 그런데 이 곳에 오게 된 이유가 워낙 명확했으니까."
대팔은 어렴풋이 영범과 함께했던 대학생활을 떠올렸다. 영범은 대팔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꽤나 있었다.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탐험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영범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면서도 느릿하게 살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대팔은 조금은 타이트한 것이 좋았다. 해외 여행을 가면 일정을 타이트하게 짜서 그 일정을 모두 소화했을 때 여행을 정말 잘 다녀왔다! 라고 느끼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여유로운 도시와 영범의 느긋한 태도는, 대팔에게는 낯설고 동시에 부러운 풍경이었다. 영범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적어도 내가 한국에서 10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건, 내가 이 생활을 계속 하다가는 내가 나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제일 컸어. 언제부턴가 모든걸 습관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삶의 계획이라는 것도 무의미해지고,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잘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산다는게 당연하다 라는 건 아니잖아."
영범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묘하게 단단했다.
대팔은 순간, 저 목소리가 오래전 대학 시절 운동장에서 새벽까지 떠들던 그 열정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형님은 한국의 직장에서는 행복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맞네요."
"맞아. 그래서 직장을 두 번 정도 옮기면서도 계속 이 곳은 내가 원하는 곳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 내가 오랜 시간을 해도 스스로를 갉아먹히지 않을 업인가 아닌가를 계속 고민하면서 살았지.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그 업을 내가 계속하지 못할 것 같더라고."
대팔은 영범이 하는 이야기를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한국에서 만났을 때의 영범의 얼굴과 치앙마이에서 만난 영범의 얼굴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영범이 천성적으로 경쟁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직장생활에서는 꾸준히 경쟁을 해야했었고, 영범은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으나 나름 이동하는 회사마다 본인의 가치를 꾸준히 올려왔기에 대팔은 영범이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구나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뒤로 미룬 것일지도 몰라. 아둥바둥 하면서 한국에서 경쟁하면서 살면 이 곳보다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을거야. 하지만 물질적으로는 여유로워도 스트레스가 많이 심해질 것 같아서 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저 친구는 경쟁에서 나가 떨어진 것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최대한 신경을 안쓰려고 해. 무엇보다 지금 이 곳의 삶이 난 참 마음에 들더라. 그리고 꼭 내가 이 생활을 10년 20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야. 또 나의 가치관이 바뀔지도 몰라. 뭐.. 그건 그때 가서 다시 고민을 해보기로 했어."
대팔은 맥주를 홀짝이면서 계속 영범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영범은 대팔이 하던 고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10년 20년 뒤에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팔이 바라본 영범의 모습은 마치 대학교 때의 그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적어도 6년 전에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가는 모습 같아보였다.
"자기야, 내가 좀 늦었지?"
"어어 아니야. 우리 이제 막 무르익었어, 대팔아, 내가 너한테 처음 소개하는거다. 예비 형수님이셔."
"예? 예비 형수님이요?"
대팔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대학교 때도 결혼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없어했던 영범이었고, 한국에 있을 때도 별 그런게 없었는데, 치앙마이에서 결혼이라고?
"반가워요 대팔씨. 영범 오빠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김혜지예요"
"와.. 처음 뵙겠습니다 형수님. 영범이형에게 형수님이라니, 어안이 벙벙하긴 하지만 미리 축하드립니다!"
대팔은 치앙마이에 와서 영범에게 여러 번 놀라는 중이었다. 그는 순간, 행복이란 누군가의 곁에서 천천히 완성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앙마이의 밤공기가 유난히 따뜻했다.
#웹소설 #백화점 #컴플레인 #소설 #픽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