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환상과 현실(2)

- 트리거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by 농도C

대팔은 주환과 헤어진 다음에도 한참을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박상철과의 대화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고, 대팔 스스로도 느끼기에 최근의 자기 모습이 왠지 대팔답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대팔은 출근길 전철에 낑겨 가고 있었다. 평소에는 자리가 그래도 한 두 자리 정도는 있었는데, 오늘은 지하철 자리 사수에 실패한 탓이다. 점점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로 꽉 채워진 지하철은 손 하나 움직일 수도, 발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저기 밀지 마세요! 저 내려야 되는데!!"

"저 내려야 한다구요!!! 좀 기다렸다가 타세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로 지하철이 시끄러웠다. 가뜩이나 잠도 못잔 상태에서 몽롱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대팔은 승객들의 앙칼진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에휴, 저게 소리를 질러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대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휴대폰의 볼륨을 올렸다. 더 이상 영향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또 한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학생은 앞에 어르신이 안보여? 젊은 친구가 어르신이 앞에 있는데 눈을 아래에 쳐박고 들지를 않네"

"네?"

"자리 좀 비켜주는게 그렇게 어려워?"

"네. 어려운데요. 저도 멀리 가야하고 오늘 시험이라 책도 봐야하구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학생 앞에 서 계셨다. 어르신도 화가 나계셨고, 학생은 시크하게 어르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양쪽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말대꾸 하는거 보소, 버릇이 없네 아주!"

"아니, 자리를 양보 받으시려고 하는거면 노약자 좌석 있잖아요. 왜 여기 서서 그러세요?"

"사람이 워낙 많이 타고 하니까! 이리 저리 밀려서 여기 온거 아냐!"

"그런데 그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아니 이 녀석이?"


이러다가 싸우겠다 싶었던지, 주변 사람들이 말렸고 건너편에 있던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싶었는데, 사람들 틈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 학생을 향해서 어르신이 계속 한 마디씩 던지셨다. "요즘 말세다 말세다 했는데 진짜 이런 세상이 없네! 어떻게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한 마디를 안져? 요즘 애들 버릇이 없다 없다 했더니 진짜 버릇이 없네!"

마침 어르신이 대팔이 서 있는 쪽에 앉으셔서, 대팔은 이어폰 볼륨 너머로 어르신의 화풀이를 다 다 듣게 되었다. 대팔은 가뜩이나 피곤한데, 오늘따라 날이 잘못 걸렸다 싶으면서도,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어려워서 그 화풀이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럼에도 어르신이 계속해서 화풀이를 하시자, 결국 참지 못했다.


"어르신, 이쯤되면 그만 하시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어? 뭐라고?"

"출근길에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죠."

"와, 저 학생도 버릇이 없더니 이 친구도 버릇이 없네.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잘못 말했냐고!"

어르신은 이제 대팔에게도 삿대질을 하면서 버릇이 없네, 요즘 개념이 무너졌네 하시면서 말을 이어가셨다. 그러다보니 주변 사람들도 어르신에게 그만 말씀하시라고, 화를 그만 내시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르신은 계속 꿍얼거리시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셨다.


'와.. 출근길부터 이게 무슨 상황이냐..' 대팔은 오늘 일에 쓸 힘을 이미 다 썼다는 듯 터덜터덜 정거장에서 내려서 회사로 향했다.

대팔은 출근을 해서도 좀처럼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시안이 기획한 화장품 프로모션은 보완할 점이 많아 보였다. 평소 같으면 굳이 지적하지 않을 보고서의 양식에 대한 부분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을 하다가 "음, 이건 마이너한 내용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평소보다 유달리 지적하는 내용이 많은 대팔이었다.

그 와중에 규민이 기획했던 프로모션의 피드백도 봐줘야 했는데, 결과를 분석한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디테일하게 보고서를 뜯어 고치게 되었고, 대팔은 어느새 펜을 들고 보고서를 재작성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규민이 "과장님, 제 보고서가 이렇게 엉망인가요..??" 라고 할 정도였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시안과 규민을 코칭하고 겨우 본인의 업무에 좀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대팔의 휴대폰이 울렸다. 로플로라 매장이었다.

"과장님, 저 로플로라 매니저인데요. 지금 박상철 고객님 또 오셨대요!"

대팔은 순간 통화중이라는 것도 잊고 "에이씨.." 라는 외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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