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많이 보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인 것도 있다. 나를 잘 알기 위해서 나는 다양한 영화를 본다. 다양한 영화를 보다 보면 나의 마음을 울리는 것과 여전히 살아있어서 기쁘거나 슬픈 이유를 이따금씩 발견한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영화의 시간을 지내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거울 보듯이 더듬어 볼 수 있다. 이건 정확하게는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 그 작가를 보면서 하는 수행이다. 나는 이 수행이 당연히 영화 너머의 작가, 감독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종류에 속해 있는 그러니까 무생물도 아닌, 동물도 아닌, 사람의 태도를 통해서 나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마주할 때면 여전히 나는 어두운 곳에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이 있기 때문에 조금씩 빛을 찾아간다고 느낀다.
며칠 전에 <체리 향기>를 보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다. 이 영화는 내내 울 수밖에 없는 영화다. 주인공인 바디는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알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 자신의 죽음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이리저리 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찾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미 자살이라는 사건을 내재하거나 예견하는 식으로 시작되고 처음부터 인간답지 못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영화다.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한지 바디의 자살을 도와주면 거액의 돈을 준다고 해도 그 도움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온다. 이런 주제라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눈물을 부추긴다.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공포일 수 있고 연민일 수도 있겠다. 왜 자살하려고 하지? 주인공의 이 알지 못하는 삶에 대한 막연한 애도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전염과 같은 죽음 충동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사연을 가지고 울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나에게 좀 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운 이유는 죽음을 하기로 한, 이렇게 바디의 결심하게 한 '막혀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친절하지 않은 영화는 바디가 자살하기로 한 이유 같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유 같은 것을 보여줘 봤자, 그러면 관객은 그 이유에 대해 집착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바디는 왜 나약해지려는가? 바디는 왜 삶의 무게에 수몰될 수밖에 없는가? 같은 질문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들은 살아야 하는 명분을 밝히는 것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영혼을 구제해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든 것들을 다 버려버리고 바디의 자살 결심 이후의 자살 실천부터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고, 이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한 점은 있다. 영혼을 구제해 주는 사람인 박물관 직원이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정말이지 대뜸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 어떻게 바디의 SUV차에 탑승하는지 같은 씬이 모조리 다 잘려나가 있다. 이 이상한 점프 편집은 이상하다. 그러나 그렇게 잘라내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박물관 직원은 바디에게 있어 '어떻게 나에게 다가왔는지'와 같은 순간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디를 살게 해주는 어떤 이야기가 바디에게 도착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물관 직원이 이렇게 대뜸 등장한 이유는 그래서 바디가 자살하기로 한 배경이 설명되지 않고 잘라져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논리를 지닌다. 영화는 가끔 편집으로 마법을 부린다. 앞과 뒤가 왜 이렇게 연결되었는지 아니?라고 질문이 훅 들어올 때가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처럼 앞에 이야기가 왜 잘려있는지 아니?라고 질문이 들어올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어코 바디는 죽을 결심을 굽히지는 않는다. 박물관 직원은 바디의 자살을 도와주기로 한다. 그렇게 내일 동틀 무렵에 자살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바디는 다시 혼자만의 길을 간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어떤 커플의 부탁으로 바디는 사진을 찍어준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더니, 무언가를 불현듯 느끼고 다시 박물관으로 가서 바디는 박물관 직원에게 이상한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행복한 연인 혹은 가족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는 행위에서 삶에 대한 무언가, 생의 의지에 대한 무언가를 당연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제발 느껴달라는 식으로 영화가 찍혀있기 때문에 너무나 빤히 마음에 채워지는 각성이다. 나도 그래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바디와 비슷하게 각성을 했다.
그렇게 영화를 다 보고, 빠져나왔다. 나는 여기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체리 향기>를 보고 나온 후 잠시 쉬러 극장 앞에 있는 경희궁에 들렀다. 날씨가 좋고 단풍이 곱게 물들어서 나들이객이 꽤 있었다. 나들이객들의 사진 찍는 모습을 보았다. <체리 향기>처럼 아름답게 물든 나무와 풀잎의 풍경 속에서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아버지가 아이를 찍어주고 있었다. 나는 방금 느꼈던 이 비슷한 각성의 진짜를 거기서 느끼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 아름다운 풍경, 이 모든 것들이 함께하는 시간. 가끔 영화에서 다 이루지 못한 감상이 영화 바깥에서 완성되기도 한다. 이 경험의 완성을 위해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