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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개가 큰 개를 보고 짓는 건 두려움 때문이다.

by 청리성 김작가

점심 먹고 산책하는 길.

걸으면서 들을 영상을 찾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지식인사이드> 채널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들어본 듯한 분의 모습이 보였다. 김주환 교수님이었다. “원인이 같으니 해결책도 같습니다.”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서 영상을 클릭했다. ‘지식인 초대석’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 시대 대가들에 순도 높은 지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이 영상을 다 듣고, 김주환 교수님의 다른 영상도 찾아들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고,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고하고 생활에 적용하면 좋을 법한 내용이 많이 있었다. 알고 보니, 제목은 익히 알고 있던, <회복 탄력성>의 저자였다. 며칠 전 구독한 밀리의 서재에 바로 담고, 조금씩 읽고 있다.


시작부터 메시지가 강렬했다.

“본질이 두려움이다.” 사람이 느끼는 여러 감정이 있는데, 그 본질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짜증, 분노, 걱정, 두려움 등의 다양한 감정의 원인은 하나라고 한다. 편도체 활성화에 따른, 공포 반응. 곧, 두려움이라는 거다. 단적인 예로,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에 관해 설명한다. 분노는 강해 보이고, 두려움은 무서워 보인다고 설명한다. 실제 그렇다. 분노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대체로 분노는 강자가 약자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떤가? 약해 보인다. 자기 처지를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참는 것으로 보인다. 갑질하는 사람과 그 갑질에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 여기서 반전.


사람의 공격 성향은, 두려울 때 나온다는 거다.

이해가 되는가? 분노에 불타서 공격하는 사람의 감정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 말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감한다. 실제 그런 상황을 보고 느꼈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봤다고 할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분노하는 사람을 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감정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볼지도 모른다. 마음이 그리 단단한 성향은 아니기에, 분노하는 사람을 보면 심장박동수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반응이 그럴 거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 표현에,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 저런다,’라는 생각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도 한다. 내 마음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렇다.

분노하는 이유 혹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고 이해하려고 무척 애를 쓴 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분노하는 눈빛에서 그걸 느꼈다. 슬픔. 슬픔이라는 감정 안에 불안이 느껴졌고, 본인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갑갑함이 느껴졌다. ‘오죽하면 저럴까?’라는 생각이 든 거다. 이런 마음이 혹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 그때부터였을 거다. 이후부터는, 짜증을 내거나 화내는 사람을 볼 때,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가도 금세 가라앉게 되었다. 두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불편한 사람은 꼭 있다.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말과 행동 자체로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조금 달리할 필요가 있다. 불편한 마음을 품고 바라보면, 내 마음만 불편하다. 좋은 마음으로 나왔다가도 마음이 불편하게 뒤엉킨다. 타인의 모습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해질 필요가 있을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왜 내 마음 상태가, 타인의 모습으로 좌지우지돼야 하는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거다. ‘오죽했으면….’ 이 말을 떠올리면 좋다. 이 말이, 시선을 바꾼다. 불편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연민의 마음이 올라온다. 내 마음을 지키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다. ‘오죽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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