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게 아팠을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로 기억한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몇 걸음만 가도 100m 달리기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계속 그랬던 건 아니고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났다. 학교 들어가기 전과 저학년 때는, 축구하면서 신나게 뛰어다녔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고, 갑자기 그랬다. 나중에 이유를 들었는데,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신 나머지, 어디 가실 때마다 점퍼 안에 넣고 다니셨다고 한다. 경로당에 즐겨 가셨는데, 그때 경로당은 너구리 소굴이었다.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는 말이다. 그 안에서 매일 있었으니, 폐 기능이 온전했겠는가? 점퍼 안에 넣고 다닐 정도면, 걷기도 전이었을 텐데 말이다.
소풍도 온전히 갈 수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소풍 장면이 있다. 학교 근처 산으로 갔는데, 혼자 갈 수 없어서 어머니가 업고 가셨다. 업고서 낮은 산을 올랐고, 도착지에 내려주셨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려갈 때 어머니가 다시 나를 업고 내려가셨다. 얼마나 그렇게 지냈는지 모르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6학년 2학기 때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장이 되었다. 그해 반 대항으로, 육상 대회가 진행됐다. 단거리 중거리 장기리를 했는데, 장거리에 나가겠다고 하는 친구가 없었다. 반장으로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걱정됐다. 그때는 많이 나아졌지만, 한동안 걷기도 힘들어했던 내가 오래달리기라니.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고 출발선에 섰다.
총성이 울리고, 모두 일제히 뛰어나갔다. 천천히 출발했다. 기억으로는 운동장 다섯 바퀴 정도 달렸던 것 같다. 한두 바퀴는 그냥 천천히 뛰었는데,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야구부였던 친구가 맨 선두로 나섰고, 나머지는 뒤처진 상태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속도가 붙은 김에 그 속도를 계속 이어갔다. 다른 친구들과 간격이 벌어졌고, 1등과 거의 반 바퀴 차이가 났지만, 2등으로 들어갔다. 나는 물론, 반 친구들도 놀랐고 함께 기뻐했다. 그때부터였다. 운동 특기 중 하나가, 오래달리기가 됐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학교 중에 2,000m 종목을 보는 곳이 더러 있었다. 학교를 선정하기 전까지는 시험 보는 모든 종목을 준비한다. 이 종목도 예외는 아니었다. 측정할 때마다, 내가 항상 1등이었다. 2,000m는 독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시 시험 치를 때, 한 학교에서 이 종목이 있었다. 만점이 6분 52초였는데, 6분 50초에 들어와서 만점을 받았다. 오래됐지만 시간과 숫자를 아직 기억하는 건,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라는 거다. 이 학교에서는 떨어졌지만, 특기라고 여기는 종목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것에 뿌듯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이가, 오래달리기가 장기가 되었다.
이해가 되는가? 사실 나도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갑자기 숨쉬기 어려워졌던 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릴 때 그랬으면, 성장하면서 계속 그래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한 걸음 딛는 것조차 힘겨웠던 내가, 오래달리기를 잘하게 된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6학년 때 오래 달리기할 기회가 없었다면, 잘 달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조금만 걸어도 숨쉬기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니 말이다.
감사할 일이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이 생각만 떠올리면, 온전히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일이다. 이 외에도 감사할 일을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이 일이 더욱 그렇다. 기적이다. 병원 치료를 특별히 받은 것도 아닌데, 소풍 갈 때 어머니 등에 업혀 가던 아이가, 오래달리기를 잘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것만 떠올리면, 불쑥불쑥 올라오는 불평들이 매우 부끄러워진다.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괘씸하게 보실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듯하다. 불평과 불만이 올라올 때 그리고 억울함과 원망이 올라올 때, 이 기억을 떠올리기도 다짐한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감사의 마음으로 방향을 틀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