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라는 동화극이 있다.
어린 남매가 성탄절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나 자기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는 거다. (참고: 네이버 사전) 곁에 있을 때는 몰랐던 소중한 사람 혹은 물건이 곁에서 사라졌을 때,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도 마찬가지다. 지금 처한 힘겨운 상황에 매몰되면, 힘들고 어려운 것들만 눈에 들온다.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어떨까? 그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힘겨워 보이는 사람을 본다.
칭얼대는 아이를 둘러업고 이동하는 엄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엄마에게는, 아이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와 관련된 물품을 담은 가방 2~3개도 함께 있다. 경험을 통해 어떤 느낌인지 아니, 힘겨움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다른 생각도 있다. 힘겨움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그 또한 지나고 나면 행복이었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다. 시간이 지나면, 칭얼대며 엉겨 붙는 아이가 그리울 때가 올 테니 말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이 모습을 보고 잔잔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이 느껴진다. ‘힘들겠지만, 지금이 좋을 때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깨닫는다.
지나고 보니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지나기 전에 깨닫는다면, 아쉬움이 덜 할 텐데. 왜 그때는 행복임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힘겨운 상황을, 과정이 아닌, 결과로 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고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끔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머피의 법칙처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힘겨운 상황이 휘몰아친다. 한 가지만으로도 버거운데, 몇 가지가 한꺼번에 올 때는, 아무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때는 힘겨움이 전부라고 느껴진다.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에 갇힌 기분이 든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매몰되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 매몰되기 때문에,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또 하나.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 멈춘다. 더는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상황에 파묻혀서 그대로 멈춘다. 누군가가 그랬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계속 걷는 것뿐이라고. 맞는 말이다. 터널 안에 있을 때, 그 안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하나다. 계속 걷는 거다. 가던 길로 계속 걷던가, 오던 길로 되돌아서 걷는 것 말고는 없다. 가만히 있다고 터널 입구가 나에게 오지 않는다. 내가 가야 한다. 힘겹고 버거운 상황이든 어려운 상황이든, 그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스스로 걷는 것뿐이다.
내가 걸어야 누군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누구의 도움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이든 물을 마시는 것이든, 스스로 하려고 해야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다가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겠는가? 가만히 있더라도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려야 한다. 그래야 도움받을 수 있다.
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다.
행복이든, 어둠을 벗어날 능력이든, 도움받을 기회든, 모든 것은 내 안에 이미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 지금 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잠시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상황에 떨어져서 보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 상황에 부닥친 나 자신을 제삼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거다. 이런 질문이 도움이 될 수 있다. “5년 후의 내가 지금, 이 모습을 바라본다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지금, 이 모습을 화면을 통해 지켜본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나의 멘토가 조언해 준다면 어떤 말을 해줄 것 같은가?”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